구현과(求賢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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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가 어진 사람을 만나 함께 국사를 의논한 꿈을 꾸고 실시한 과거.

개설

1775년(영조 51)에 영조가 꿈에 현자(賢者)를 만나 함께 국사를 의논하였는데, 이는 반드시 훌륭한 보필을 얻을 징조라 생각하여 문무과를 실시하고 과명(科名)을 구현과라 하였다. 구현과는 1775년(영조 51)에 단 1번만 시행되었다.

내용 및 특징

영조대 이전에도 구현(求賢), 즉 어진 이를 구한다는 명분으로 과거를 시행한 사례가 1464년(세조 10)에 한 차례 있었다. 7월 23일에 정인지(鄭麟趾) 등이 대책(對策)을 평가하여 최항(崔恒)·임원준(任元濬)·김수온(金守溫)을 1등으로 삼고, 강희맹(姜希孟)·이승소(李承召)·김종직(金宗直)·노사신(盧思愼)·양성지(梁誠之)·정난종(鄭蘭宗)·홍귀달(洪貴達)을 2등으로 삼고, 박원형(朴元亨) 외 20명을 3등으로 삼아 세조에게 올렸다. 세조는 1등의 대책을 읽어 보고 다시 김수온을 장원으로 하였다. ‘어제구현재시(御製求賢才試)’라는 이름으로 방(榜)을 내리고 입격한 사람들에게 모두 품계를 올려 주었다(『세조실록』 10년 7월 23일).

이와 관련된 기사가 행중추부사양성지(梁誠之)의 졸기에 보이는데 “갑신년 구현시에 합격하였다[甲申 中求賢試]”고 하였다(『성종실록』 13년 6월 11일). 구현시라 하였으나 이는 과거가 아니라 현직 고위 관리들을 대상으로 하여 승진의 특혜를 주기 위한 시험이었다.

기대승은 경연에서 구현이란 정자(程子)가 임금이 나라를 잘 다스리려면 먼저 뜻을 세우고 어진 이를 찾아 책임을 지워야 한다는 데서 기인한다고 하며, 구중(九重)에 있는 왕은 보고 듣는 것이 넓지 못하여 은택(恩澤)이 아래에까지 미치게 하려면 반드시 현인을 얻어 의심하지 말고 맡겨야 하며 그래야 정사가 공평해진다(『선조수정실록』 1년 4월 1일)고 주장하였다. 즉 구현은 어진 이를 찾아 책임지고 정사에 임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구현의 의미를 과명으로 삼아 구현과를 시행한 왕이 영조였다. 1775년(영조 51)에 영조는 현자를 만나 함께 국사를 의논한 꿈을 꾸었는데, 이는 필시 훌륭한 보필을 얻을 징조라고 생각하여 과거를 실시하였다.

1775년 11월 14일에 집경당에 나아가 태학과 사학 유생을 대상으로 제술(製述) 시험을 시행하여 대책을 작성하게 하였다. 조진관(趙鎭寬)에게 장원급제를 내리고 을과에 1명, 병과에 3명 모두 5명을 뽑고 구현과라 하였다. 조진관이 작성한 대책을 본 영조는 문장을 만드는 데 말이 간략하고 왕의 부족한 점을 말한 것이 진실로 깊고 절실하며, 꿈속에서 수작한 것과 서로 비슷하니 이는 우연한 일이 아니라고 하였다. 조진관은 조상경(趙尙絅)의 손자이며 조엄(趙曮)의 아들이었다. 영조는 친히 제문(祭文)을 지어 고(故) 판서조상경에게 치제(致祭)하였다(『영조실록』 51년 11월 14일). 이어서 11월 16일에는 융무당(隆武堂)에서 내금위(內禁衛)·겸사복(兼司僕)·우림위(羽林衛) 삼청(三廳)의 권무군관(勸武軍官)을 대상으로 무과를 실시하였다. 창방(唱榜)은 집경당에서 하였다. 조진관의 아버지 조엄을 예조 판서로 삼고, 홍문관 제학조진관을 특명으로 품계를 더하고 술잔을 내려 주었다(『영조실록』 51년 11월 16일).

구현과 문과에 급제한 사람은 모두 5명으로 갑과 장원에 승정원 동부승지조진관, 을과 1위에 전주부정문계(鄭文啓), 병과 1위에 전봉사 윤상동(尹尙東), 병과 2위에 진사 심능익(沈能翼), 병과 3위에 진사 이수함(李壽咸)이었다. 무과는 47명을 선발하였는데 장원은 이서백(李瑞白)이었다.

참고문헌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