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안전(景安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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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동궁(東宮)에 있던 예종의 신주를 모신 혼전(魂殿).

개설

혼전은 산릉에서 장례를 치른 뒤 신주를 모시고 궁궐로 돌아와 종묘(宗廟)에 신주를 부묘(祔廟)할 때까지 신주를 봉안하는 곳이다. 혼전의 존재 기간은 왕과 왕후에 따라 달랐으며, 왕후도 왕보다 먼저 혹은 나중에 승하하느냐에 따라 존재 기간이 같지 않았다. 왕은 장례를 치르는 시점이 대체로 승하한 지 5개월 만에 이루어지므로 혼전은 3년(27개월) 중 22개월 동안 존재하였다.

경안전(景安殿)은 조선 제8대 왕 예종의 혼전이다. 예종은 세조의 둘째 아들로, 어머니는 정희왕후(貞熹王后)이다. 1469년(예종 1) 예종이 승하하자 혼전의 전각명을 ‘경안(景安)’으로 정하고(『성종실록』 즉위년 12월 18일), 4개월 뒤 창릉(昌陵)에 장례를 치렀다. 3년의 상제가 끝난 뒤 종묘 정전 제7실에 부묘할 때까지 경안전에 신주가 봉안되어 있었다.

내용 및 특징

1469년 11월 28일 예종이 경복궁 자미당(紫薇堂)에서 승하하자 충순당(忠順堂)에 빈전(殯殿)을 마련하였다. 1470년(성종 1) 2월에 시신을 넣은 관인 재궁(梓宮)을 묻고 반우(返虞)하여 미리 마련한 혼전에 신주를 봉안하였다(『성종실록』 1년 2월 5일). 이때 경복궁에 조성한 혼전명이 경안전이다.

경안전은 경복궁 동궁에 설치하였다(『성종실록』 즉위년 12월 17일).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는 경복궁 안에 있었다고 되어 있다. 혼전이 존재한 동안 경안전은 예종을 가리키는 대명사로도 쓰였다.

경안전에서 거행한 의식은 반우한 뒤 초우제(初虞祭)를 시작으로 칠우제(七虞祭)까지의 우제를 모두 지낸 뒤 졸곡제(卒哭祭)를 거쳐 소상제(小祥祭), 대상제(大祥祭), 담제(禫祭)를 거행하였다.

1472년(성종 3) 1월 11일 부묘 하루 전, 성종이 경안전에 나아가 고동가제(告動駕祭)를 행하고, 예종의 신주와 장순왕후(章順王后)의 신주를 받들어 종묘에 이르러 장전(帳殿)에 안치하였다. 다음 날인 1월 12일에 환조(桓祖)와 의혜왕후(懿惠王后)의 신주를 영녕전에 부묘한 뒤 예종과 장순왕후의 신주를 태실(太室)에 승부(陞祔)하였다. 따라서 경안전은 예종의 신주를 봉안하기 시작한 1470년(성종 1) 2월 5일부터 3년상을 마치고 종묘에 부묘한 1472년 1월 12일까지 경복궁 동궁에 설치되었다.

변천

혼전은 신주를 부묘한 뒤에는 철거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경안전이 있었던 경복궁은 이후 임진왜란이 발생하여 왜적이 궁궐을 불태웠을 때 경복궁과 함께 소실되었다.

참고문헌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정옥자 외, 『조선시대 문화사』(상), 일지사,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