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청사(國淸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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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인조 때 남한산성 내에 건립한 7개 승영사찰(僧營寺刹) 중 하나.

개설

국청사(國淸寺)는 경기도 광주시남한산(南漢山)에 있는 절이다. 1624년(인조 2) 남한산성(南漢山城)을 축성할 때 산성의 방어를 위해 성 내에 건립한 승영사찰(僧營寺刹)이었다. 국청사는 남한산성의 서문(西門)인 우익문 가까이에 위치하여 서문의 방어를 책임졌다. 1907년 군대해산령으로 일제에 의해 남한산성 내 대부분의 승영사찰이 파괴될 때 함께 파괴되었다. 이후 오랫동안 절터만 남아 있던 것을 1968년 보운(普運)이 중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내용 및 특징

1624년(인조 4) 조선 조정은 이괄(李适)의 난을 겪은 후 축성의 중요성이 부각되어 벽암각성(碧巖覺性)을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으로 삼고 전국의 승군(僧軍)을 동원해 남한산성을 축성하였다. 산성은 2년 5개월 만인 1626년 4월에 완공되었는데, 축성 당시 이전부터 있던 망월사(望月寺)와 옥정사(玉井寺) 외에 7개의 사찰(국청사, 장경사, 개운사, 한흥사, 천주사, 동림사, 남단사)을 새로 건립하였고, 그 사찰 중 하나가 국청사였다. 국청사를 비롯한 산성 내의 7개 사찰은 축성에 동원된 승려들이 거처하며 숙식을 해결하는 군막(軍幕) 사찰의 성격을 띠었다. 축성 후 승군은 사찰에 주둔하면서 산성을 방어하고 군사 훈련을 받았다.

벽암각성이 1624년 국청사와 한흥사를 건립할 때 이름을 ‘국청(國淸)’, ‘한흥(漢興)’으로 지었는데, 당시에는 그 뜻을 알지 못했다고 한다. 그런데 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을 겪고 나서, ‘한(汗)’은 ‘한(漢)’과 음이 같고 여진족의 후금(後金)이 그 해에 국호를 청(淸)으로 고쳤음을 알고서, 벽암이 절 이름을 ‘한흥’과 ‘국청’으로 한 연유를 알았다고 한다(『정조실록』 3년 8월 9일).

국청사는 남한산성 서문(西門)인 우익문 인근에 위치한 사찰로, 여기에 주둔한 승군이 서문의 방어를 책임졌다. 병자호란이 일어나 남한산성이 청군에 의해 포위되었을 때, 항전을 벌인 인조와 소현세자는 국청사의 부처님 전에 불을 밝히고 향을 피우며 위기에 처한 나라와 백성을 구해달라고 기원했던 것으로 전한다. 청군과 맞선 조선의 군사와 난을 피해 온 백성들도 죽음의 공포 속에서 모두 국청사의 부처님께 전승을 기도하고 불안한 마음을 해소했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국청사는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 맑은 우물[國淸寺井]이 있었다고 한다. 그 물이 일찍부터 위장병을 비롯한 여러 질병에 효험이 있어 인조와 소현세자, 문무백관, 군사, 백성에 이르기까지 그 물을 마시며 건강을 유지했다고 전한다. 이와 관련된 다음과 같은 전설도 내려온다.

옛날 이집이라는 남자가 등창을 앓는 아버지에게 온갖 약을 해드려 봐도 효험이 없자 국청사에서 불공을 드리게 되었다. 100일째 불공을 드리고 새벽 기도를 마치고 돌아오던 길에 샘물에 있던 금붕어를 잡아 집으로 가져왔다. 그날 밤 아버지가 잠을 자다가 목이 말라 일어나서 금붕어가 들어있는 물을 먹었다. 순간 종기가 터지고 시원해지면서 등창이 바로 나았다고 한다. 이후 국청사의 샘물은 전국에 알려져, 피부 질환을 앓고 있는 환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국청사는 남한산성 내의 다른 사찰들과 함께 전국의 사찰에서 소집된 의승군(義僧軍)이 중심이 되어 운영되었다. 『남한지(南漢誌)』에 따르면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을 겸임한 승군총섭(僧軍總攝)의 지휘 아래 함경도와 평안도를 제외한 전국 350여 명의 의승(義僧)이 의승입번제(義僧立番制)에 따라 매년 2개월씩 윤번(輪番)으로 사찰에 복무하였다. 전국의 사찰에 할당된 수의 승려가 교대로 산성을 방위하는 이 제도는 지방 사찰의 재정을 고갈시키는 등 많은 폐단을 가져와 1756년(영조 32)에 폐지되었다. 대신 의승방번제(義僧防番制)에 의해 번을 서지 않는 대가로 방번전(防番錢)을 10~22냥 납부하면 산성 사찰에서 복무하는 것을 면제받도록 하고, 본래부터 거주하는 승려[元住僧]로 하여금 그 역에 응하도록 하였다. 1785년(정조 9) 의승의 방번전이 절감되는 조치가 내려지는 등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승군에 의한 사찰 운영은 1894년 갑오개혁으로 승군제가 폐지될 때까지 지속되었다.

변천

(1) 근현대기의 국청사

1907년 8월 군대해산령 때 남한산성 내의 9개 승영사찰은 사찰 내에 있던 무기고와 화약고가 폭파되면서 사찰 대부분이 파괴되었다. 당시 국청사도 이 참화를 벗어나지 못하고 파괴되고 말았다. 국청사의 대웅전 안에 천장을 만들고 그 천장 안에서 화약을 제조하였는데, 이것이 일제에 의해 발각되어 폭파되었다고 한다. 이후 국청사는 오랫동안 절터만 남아 있다가 1968년 보운(普運)이 중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국청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4교구 본사인 선운사의 말사이다.

지금의 국청사는 옛 절터에서 약 50m 정도 이전해 새로운 터를 닦아 대웅전과 종무소, 요사를 겸한 현대식 건물 1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법당 안의 주불(主佛)은 현재 한국에 3기만 있는 불상으로, 859년(신라 헌안왕 3) 범일(梵日) 국사(國師)가 강원도 철원보개산의 심원사에 조성하여 봉안했던 천불(千佛) 중 일불(一佛)이라고 한다.

문화재

성삼문(成三問)의 친필이 적힌 병풍과 송시열(宋時烈)의 친필로 된 책자 3권이 전한다. 절 인근에 국청사정(國淸寺井)이라는 작은 우물이 있다.

참고문헌

  • 『가람고(伽藍攷)』
  • 『남한지(南漢誌)』
  • 대한불교조계종 불교사회연구소 편, 『한국호국불교의 재조명』1·2, 대한불교조계종 불교사회연구소, 2012.
  • 전보삼, 『남한산성과 팔도사찰』, 대한불교진흥원, 2010.
  • 박용숙, 「조선후기 승역에 관한 고찰」, 『논문집』31, 부산대학교, 1981.
  • 여은경, 「조선후기 산성의 승군총섭」, 『대구사학』32, 대구사학회,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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