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국공신(開國功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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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이성계를 도와 조선을 건국한 공로로 태조대와 태종대에 책봉된 공신.

내용

1392년(공양왕 4) 4월에 정몽주를 암살한 이방원은 6월에 남은·조인옥·정도전·조준·조박 등 50여 명과 모의하여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할 것에 합의하였다. 이들은 이성계와 함께 위화도에서 회군한 사람들이 주축이 되었으며, 조정의 고위 관료들도 포함되었다.

이로부터 한 달 후인 7월 17일에 이성계가 왕위에 올랐다. 태조 이성계는 왕위에 오른 지 한 달도 안 된 1392년(태조 1) 8월 2일에 개국공신 책봉을 위한 공신도감을 설치하였다. 8월 20일에는 태조 이성계가 직접 44명의 개국공신 명단과 함께 공훈을 3등급으로 나누어 발표하였다. 1등급에는 배극렴·조준·정도전 등 17명이 포함되었고 2등급에는 박포·조영규 등 11명, 3등급에는 심효생·한충경 등 16명이 포함되었다. 태조 이성계는 9월 27일에 7명을 추가로 개국공신에 책봉하였다가 11월 19일에 또 1명을 추가하였다. 이렇게 하여 태조 이성계가 책봉한 개국공신은 총 52명이 되었다. 좌명개국공신(佐命開國功臣)의 칭호를 받은 1등공신은 17명, 협찬개국공신(協贊開國功臣)이라 불린 2등공신은 24명, 익대개국공신(翊戴開國功臣)의 칭호를 받은 3등공신은 11명이었다.

태조대의 개국공신 52명은 개경의 명문 출신, 과거에 합격한 시골 출신, 이성계를 추종하는 무인세력, 이방원을 추종하는 세력들이 두루 섞여 있었는데, 이성계 추대에 합의하였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이후 개국공신은 두 차례의 왕자의 난을 겪으면서 13명이 역적으로 몰려 공신에서 취소되고 39명만 남게 되었다.

용례

賜開國功臣之號 一等曰佐命開國 二等曰協贊開國 三等曰翊戴開國(『태조실록』 1년 10월 9일)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국조공신록(國朝功臣錄)』
  • 신명호, 『조선의 공신들』, 가람기획, 2003.
  • 정두희, 『조선초기 정치지배세력연구』, 일조각, 1983.
  • 김윤주, 「조선 초 공신책봉과 개국·정사·좌명공신의 정치적 동향」, 『한국사학보』 35, 2009.
  • 박천식, 「조선 개국공신에 대한 고찰-책봉 과정과 대우를 중심으로」, 『전북사학』 1, 1977.
  • 한영우, 「조선 개국공신의 출신에 대한 연구」, 『조선전기사회경제연구』, 을유문화사,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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