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차(科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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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제술 시험에서 성적을 매기고 등수를 정하는 일.

개설

시험이 끝나면 시관(試官)들이 답안을 검토하고 성적을 매긴 후 등수를 정하였다. 성적은 상상(上上)에서 하하(下下)까지의 9등급과 그 아래의 차상(次上)·차중(次中)·차하(次下)·갱(更)·외(外) 등으로 매겼으며, 성적에 따라 등수를 정하였다. 과차를 할 때는 답안 작성자의 인적 사항을 알아볼 수 없게 하여 시험의 공정성을 기하였다.

내용 및 특징

시험이 끝나면 시험의 관리를 담당한 차비관(差備官)들이 정리한 시권(試券)을 시관에게 넘겨 채점을 시작하였다. 시권에서 인적 사항을 기록한 부분인 피봉(皮封)은 가리거나 아예 잘라서 따로 보관하여 답안 작성자를 확인할 수 없도록 하였다. 문과에서는 답안의 사본을 만들어 사본인 주초(朱草)로 채점을 진행하기도 하였다. 필체로 답안 작성자를 알아보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채점 방식은 시험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일반적인 경우는 시관들이 함께 답안을 검토하고 성적을 부여하였다. 그러나 정시(庭試)나 알성시(謁聖試) 문과처럼 시험 당일 합격자를 발표하는 시험은 채점 시간을 단축하기 위하여 2단계로 나누어 진행하였다. 먼저 시관들이 답안을 나누어 검토하여 우수한 답안을 선별하고 선별된 답안을 시관들이 모여 다시 검토하였는데, 전자를 분고(分考), 후자를 합고(合考)라고 하였다(『숙종실록』 38년 5월 25일).

성적의 등급은 시기에 따라 어느 정도 차이가 있었다. 『경국대전』에는 상상(上上)에서 하하(下下)까지의 9등급으로 성적을 매기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명종대에는 9등급 외에 차상(次上)·차중(次中)·차하(次下)의 3등급이 더 확인되었다(『명종실록』 8년 3월 28일). 선조대 유희춘(柳希春)의 『미암일기(眉巖日記)』에는 점삼하(點三下)·점차하(點次下)와 같이 점을 찍어 구분한 사례도 보였다. 인조대의 기록에는 재검토를 의미하는 원갱(圓更)과 갱(更) 혹은 무권갱(無圈更), 탈락을 의미하는 외(外)도 등장하여 등급이 더 세분화된 것을 볼 수 있었다. 삼하일(三下一)·삼하이(三下二)와 같은 방식으로 구분한 경우도 있었다.

성적이 세분화되는 것과 함께 합격 기준점도 변화하였다. 당초에는 하하, 곧 삼하(三下) 이상만을 합격시켰으나 명종대부터는 차하 이상을 합격시켰다. 조선후기에는 전반적으로 성적을 낮게 부여하면서 갱(更)이나 외(外)의 성적으로 합격한 경우도 있었다. 다만 왕이 과차에 참여하는 경우는 합격 답안에 삼하 이상의 성적을 부여하였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경국대전(經國大典)』
  • 『미암일기(眉巖日記)』
  • 심영환, 『조선시대 고문서 초서체 연구』, 소와당, 2008.
  • 박현순, 「조선후기 시권에 대한 고찰-시종별 시권의 특징을 중심으로」, 『고문서연구』 41, 한국고문서학회, 2012.
  • 김동석, 「조선시대 시권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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