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국백(啓國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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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화령·안변·완산의 성황신에게 수여한 작위.

내용

1393년(태조 2) 대사성유경(劉敬)의 건의에 따라 예조가 상정하여 이조가 건의하는 형식으로 전국의 명산과 대천(大川)·성황·해도(海島)의 여러 신들에게 작위를 수여하였다. 이때 화령(和寧)·안변(安邊)·완산(完山)의 성황신을 계국백으로 봉했다. 화령은 이후 영흥으로 개칭되었다.

신들에게 작위를 수여하는 전통은 7세기 당나라에서 시작했고, 한국에서는 신라시대말부터 시작하여 고려시대에 유행했다. 신에게 작위를 수여한다는 것은 신을 예우하는 차원이며, 작위에 따라 신을 등급화한다는 의미도 있다. 그런데 성황신은 고을의 수호신이며, 따라서 성황신의 작위는 곧 고을의 위상을 반영한다. 이러한 전통에 따라 안변과 전주의 성황신은 고려시대에 이미 신앙되고 있었는데, 안변의 성황신은 선위대왕(宣威大王)으로 봉해졌다.

조선초 이를 계승하여 영흥과 안변·전주의 성황신에게 작위를 부여한 것으로, 봉작호의 백은 공(公)의 다음 등급인 바, 계국백은 2등급의 작위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계국이란 작호(爵號)로 미루어 이들 성황신은 조선 왕조 건국에 도움을 주었다는 것인데, 영흥은 태조이성계가 태어난 곳이며, 안변은 태조의 증조부인 익조(翼祖)의 무덤이 있는 곳이며, 전주는 전주이씨의 발상지라는 사실이 고려된 것 같다. 이러한 조치에 따라 이들 성황신의 위패에는 계국백이란 표현을 사용했으며, 국가에서 향과 축문을 내려 보내 제사하도록 했다. 당시 영흥 성황사에는 위패와 함께 남녀 6위의 목상이, 전주에는 5위의 신상이 모셔져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신에게 작위를 수여한 것과 신상 설치가 중국 명나라 『홍무예제(洪武禮制)』에 위배되자, 조선 왕조에서도 신들의 봉작 폐지와 신상 철거 논의가 1413년(태종 13)부터 시작되었고, 이 과정에서 전주 성황신의 경우는 위패에서 계국이란 표현이 삭제된 것으로 보인다. 1430년(세종 12) 기록에 전주 성황신의 위패에는 ‘전주부성황지신(全州府城隍之神)’이라 적혀 있었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때까지도 영흥부의 경우는 여전히 ‘성황계백지신(城隍啓國伯之神)’이었다가, 마침내 1437년(세종 19)에 와서야 계국백이란 표현을 삭제하고 ‘영흥성황지신’으로 적었다. 이와 함께 이들 성황신 제사는 국가 차원이 아니라 지방 수령이 거행하는 것으로 위상이 격하되었다. 안변 성황신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지만 같은 길을 걸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영흥의 성황사는 영흥의 진산인 성력산(聖歷山)에, 안변 성황사 역시 진산인 학성산(鶴城山)에, 전주 성황사는 기린봉(麒麟峰)에 있었다고 한다. 이 중 전주 성황사의 경우, 중종 때 전라관찰사이언호(李彦浩)가 곤지산으로 옮겼으며, 그 후 다시 지금의 승암산(僧巖山) 동고사(東固寺) 자리로 이전했다고 한다. 그리고 성황신으로는 신라의 마지막 왕인 김부대왕(金傅大王)을 모셨는데, 성황사에는 김부대왕과 그의 부인과 아들 5위의 소상(塑像)이 있었다고 한다. 이로 미루어 신상 철거는 성황사가 없어질 때까지 잘 지켜지지 않았던 것 같다.

용례

吏曹請封境內名山大川城隍海島之神 松岳城隍曰鎭國公 和寧安邊完山城隍曰啓國伯 智異無等錦城雞龍紺嶽三角白嶽諸山晋州城隍曰護國伯 其餘皆曰護國之神 蓋因大司成劉敬陳言 命禮曹詳定也(『태조실록』 2년 1월 21일)

참고문헌

  •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송화섭, 「전주의 성황신앙과 견훤정권」, 『후백제 견훤정권과 전주』, 주류성,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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