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삼(家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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밭에서 재배한 인삼.

개설

인삼(人蔘)은 엄격한 의미에서 산에서 자생하는 자연 인삼, 즉 산삼(山蔘)을 말한다. 하지만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인삼’이라는 용어를 산삼인지 가삼(家蔘)인지 구분하지 않고 사용하기도 했다. 가삼은 특별히 산삼에 반대되는 개념으로서, 인삼의 종자를 얻어서 밭에서 키워 낸 재배 인삼을 뜻한다.

형태 및 생태

인삼은 두릅나무과에 속하는 다년생 초본 식물이다. 인삼은 북위 30~40도 지역에서 자생하는 식물로서 인삼의 인공 재배도 같은 지역에서 가능하다. 다만 재배 지역에 따라 명칭이 다른데, 중국의 운남성과 광서성 일대에서 생산되는 인삼은 전칠삼(田七蔘, Panaxnotoginseng F. H. Chen), 미국과 캐나다의 것은 화기삼(花旗蔘, Panax quinquefolium L.), 일본의 것은 죽절삼(竹節蔘, Panax japonicus C. A. Meyer), 우리나라의 인삼은 고려인삼(Panax ginseng C. A. Meyer)으로 달리 인식한다. 특히 고려인삼은 약제로서의 효능이 뛰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사포닌(Saponin)이라는 성분의 함유량이 월등히 많기 때문이다.

역사적 관련 사항

산삼은 일명 ‘신초(神艸)’ 혹은 ‘지정(地精)’으로 불렸으며, 죽은 사람도 되살린다는 기사회생(起死回生)의 귀한 약재이자 온갖 약초 중의 신령한 물건으로 인식되던 약용 특산물이다. 그러나 산삼의 산출량은 심마니의 천운(天運)에 전적으로 기대야 했기 때문에 자연히 사회적 수요에 비해 그 양이 턱없이 부족했다. 이에 산양삼(山養蔘), 즉 산에 종자를 심어 자라기를 기다렸다가 캐내는 인삼을 생산하기도 했다. 산양삼은 이런 의미에서 자연삼과 재배삼의 중간적 범주에 든다. 하지만 그 산출량에도 한계가 있었다.

우리나라 산삼은 그 약효의 우수성 때문에 고대(古代)로부터 인삼 상인에게 넘겨져 해외로 수출되었다. 그렇지만 산삼이 본격적인 무역 상품으로써 경제적 비중과 의미를 갖기 시작한 것은 17세기 중엽부터이다. 이때부터 산삼이 중국과 일본에서 각광을 받았기 때문이다. "인삼(산삼)은 비록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것이지만 상인 놈들이 북경과 동래로 옮겨 팔기 때문에 자연히 국내에서는 희귀하게 되었다.", "강계에서 캐낸 인삼(산삼)은 모두 사상(私商)의 손에 들어가 북경으로 팔려나간다.",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인삼(산삼)은 10분의 8~9는 일본으로 넘어"가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는 의학의 발달과 함께 인삼의 효능이 중국과 일본에 널리 알려졌고, 약효가 뛰어난 조선 인삼에 대한 수요가 급증했기 때문이었다. 산삼의 대량 채취와 수출이 계속되면서 조선의 인삼 품귀 현상은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 이에 18세기에는 나라 안에서 약용으로 쓸 인삼도 얻기가 어려운 상황이 벌어지게 되었다.

따라서 조선 사회는 인삼 채취 단계에서 인삼 재배 단계로의 진입을 모색하게 되었다. 그 결과 인삼 종자를 밭에 심어 재배하는 가삼이 출현하였다. 가삼이 언제, 어느 지역에서, 누구에 의해 생산 단계로 접어들었는가는 분명하지 않다. 단지 여러 기록으로 볼 때 인삼 재배는 늦어도 18세기 초반에 시작되어 18세기 중반 이후 전국적으로 확산되었고, 18세기 후반에는 강계 지방에도 삼포(蔘圃)가 권장될 정도로 성행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18세기 후반에는 "경상도와 강원도에서 중앙의 내의원으로 상납되는 인삼은 대부분 가삼이다."라고 하거나, "영남은 예로부터 산삼이 나오는 지방이라고 했으나 근래 산삼이 점점 귀해짐에 따라 집집마다 인삼을 재배하는 것이 풍속이 되었다."라고 할 정도로 인삼 재배가 성행했다. 이러한 사회적 상황 속에서 이학규의 『삼서(蔘書)』, 서호수의 『해동농서(海東農書)』, 서유구의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 등 조선후기 농서에서도 가삼 재배법을 체계적으로 소개하였다.

가삼 재배가 성행하자 그에 대한 가공 기술도 발전했다. 4~5년 된 가삼을 밭에서 뽑은 것을 생삼(生蔘) 혹은 수삼(水蔘)이라고 했다. 생삼은 수분을 포함하고 있어 오래 보존할 수 없었다. 따라서 생삼의 부패를 방지하기 위해서 자연 건조시켰는데, 이를 백삼(白蔘) 혹은 건삼(乾蔘)이라고 했다. 하지만 건삼은 시간이 오래 지나면 부서지는 한계를 갖고 있었다. 이에 인삼을 끓여 말리는 방법을 쓰기도 했는데 이를 파삼(把蔘)이라고 했다. 또한 인삼을 쪄서 말리는 증조(蒸造)의 방식도 나타났는데, 이렇게 가공한 인삼을 홍삼(紅蔘)이라 불렀다.

참고문헌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홍재전서(弘齋全書)』
  • 『중경지(中京誌)』
  • 이철성, 『조선후기 대청무역사 연구』, 국학자료원, 2000.
  • 유승주·이철성,『조선후기 중국과의 무역사』, 경인문화사, 2002.
  • 염정섭, 「18세기 가삼 재배법의 개발과 보급」, 『국사관논총』102, 2003.
  • 정은주, 「조선후기 가삼 재배와『蔘書』」, 『한국실학연구』24,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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