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감영(忠淸監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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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충주와 공주 지역에 설치되었던 충청도관찰사가 집무를 보던 관청.

개설

충청감영(忠淸監營)은 처음에는 조선 1395년(태조 2)에 공홍4주(公洪四州)에 속하는 군현을 합하여 충주에 설치하였다. 1404년(태조 4)에 충청도명이 정해졌고, 임진왜란 이후 1603년(선조 36)에 충주에서 공주로 옮겨서 설치하였다. 1895년(고종 32)에 전국에 23부제를 실시되면서 충청감영도 폐지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충청도는 고려 공민왕 때에 양광도를 개칭한 것이다. 조선이 건국한 뒤 1395년(태조 4)에 관찰사를 두고 충주에 감영을 설치하였다. 중앙의 6조를 그대로 옮긴 이·호·예·병·형·공 6방을 설치하여 향리를 통해 감사가 도(道)의 사무를 집행하였다.

조직 및 역할

충청감영의 조직을 살펴보면, 조선후기의 통계로 관찰사겸순찰사는 문관 2품으로 2년마다 교체하였다. 관찰사 1명, 병마절도사 2명인데 관찰사겸수군절도사 2명, 관찰사겸병마우후 1명으로 종3품이었다. 그 밖에 수군우후 1명은 정4품이었다.

관찰영에는 비장(裨將) 8명, 지구관(知彀官) 2명, 기고관(旗鼓官) 2명, 별초병방군관(別抄兵房軍官) 2명, 별장 2명, 천총 3명, 파총 6명, 백총 3명, 초관 29명, 기패관(旗牌官) 64명, 도훈도(都訓導) 30명, 군령훈도(軍令訓導) 10명, 교사(敎師) 30명, 목미아병초관(牧米牙兵哨官) 10명, 군기감관(軍器監官) 2명, 별초군관(別抄軍官) 200명, 별무사(別武士) 360명, 재가군관(在家軍官) 200명, 수첩군관(守堞軍官) 1,000명, 영리(營吏) 37명, 계서(啓書) 18명, 마두(馬頭) 15명, 진리(鎭吏) 54명, 지인(知印) 36명, 영노(營奴) 44명, 영비(營婢) 29명, 사령 25명, 군뢰(軍牢) 25명, 순령수(巡令手) 8명, 책장(冊匠) 7명, 묵장(墨匠) 19명이 속해 있었다.

도사(都事)는 문관 6품으로 12개월마다 교체하였다. 그 아래에 영리 3명, 마두 6명, 배리(陪吏) 2명, 지인 2명, 사령 10명이 속해 있었다.

충청도에는 충주·청주·공주·홍주 네 곳에 판관이 있었다. 판관은 일반 행정 이외에 특수한 사무를 맡았다. 충청도에는 해운판관으로 문관 5품이었으며, 조운 사무(事務)를 맡아보았다. 그 밖에 해운리(海運吏)가 3명 있었다.

중군은 무관 3품으로 관찰사 군사를 보좌하였다. 그 아래에 기고관 2명, 대솔군관(帶率軍官) 30명, 진리 6명, 지인 4명, 노 4명, 비 3명이 있었다. 또한 심약(審藥)과 검율(檢律)은 이조에서 파견했는데, 율(律)의 해석과 적용 및 집행에 관한 사무를 관장하였고 15개월마다 교체하였다. 화사(畫師)는 예조에서 파견했는데 24개월마다 교체하였다.

변천

조선 1413년(태종 13)에 여흥(驪興)·안성(安城)·음죽(陰竹)·양성(陽城)·양지(陽智)를 경기도로 옮겨 속하게 하고(『태종실록』 13년 8월 1일), 경상도에 속해 있던 옥천·영동·황간·청산·보은을 옮겨 왔다(『태종실록』 13년 9월 10일).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충주의 전 지역이 거의 초토화되어 1603년(선조 36)에 감영을 공주(公州)로 옮겼다. 공주는 정유재란 때에 일시 함락된 적은 있으나 충주보다는 피해가 적었다.

1895년(고종 32)에 전국에 23부제를 실시하면서 감영, 안무영과 유수 폐지에 관한 안건[監營按撫營竝留守廢止件]이 반포되면서 충청감영도 폐지되었다(『고종실록』 32년 5월 26일).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여지도서(輿地圖書)』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