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락역(昌樂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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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경상도 순흥에 위치했던 역.

개설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의하면, 창락역(昌樂驛)은 순흥도호부 서쪽 30리(약 11.8㎞) 지점에 위치하였다. 고려시대에 창락역은 흥주(興州: 현 순흥)에 위치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서 창락역은 창락도(昌樂道)의 대표 역(驛)으로, 창락도찰방이 집무를 보는 중요 역이었다.

내용 및 변천

창락역은 고려시대에도 존재하였으며, 고려 22역도 중 평구도(平丘道) 소속이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창락역은 『세종실록』「지리지」에 창락도 소속의 역으로 기록되어 있다(『세종실록』 지리지 경상도). 1462년(세조 8) 전국적인 역도제(驛道制)의 개편 때에도 창락역은 창락도 소속이었으며(『세조실록』 8년 8월 5일), 『경국대전(經國大典)』과 『대전회통(大典會通)』에도 창락도 소속으로 기록되어, 조선후기까지 그 소속에 변동이 없었다.

하지만 창락역이 위치한 순흥도호부가 단종 복위 사건에 연루되어, 1457년(세조 3) 순흥이 혁파되고 창락역은 한동안 풍기군에 속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창락역은 풍기군 서쪽 13리(약 5.1㎞)에 있는 것으로 기록돼 있다. 하지만 1683년(숙종 9)에 순흥부가 복구되면서 창락역은 다시 순흥 소속이 되었다.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의하면, 창락역에는 대마(大馬) 2마리, 중마(中馬) 5마리, 복마(卜馬) 9마리, 역리(驛吏) 53명, 역노(驛奴) 22명, 역비(驛婢) 11명이 배속되어 있었다.

창락역은 한양에서 죽령을 넘어 풍기·안동·경주 방면으로 향하는 교통로상에 위치하였다. 죽령이 국가적으로 매우 중시되었던 고개였던 만큼, 죽령 바로 남쪽에 위치했던 창락역 역시 매우 중요한 역으로 간주되었다. 그런 까닭에 조선시대에는 창락역을 중심으로 역도를 편성하여 창락도라 칭하였던 것이다. 창락역은 창락도의 대표역이었으며, 창락도찰방이 집무를 보던 곳이기도 하였다.

창락역에서는 서쪽으로 단양 장림역(長林驛), 동쪽으로 순흥 죽동역(竹洞驛), 동남쪽으로 영천(榮川) 창보역(昌保驛), 남쪽으로 안동 유동역(幽洞驛) 등과 연결되었다.

1896년(고종 33) 1월에 대한제국 칙령 제9호 ‘각 역 찰방 및 역속 폐지에 관한 건’에 따라 전국의 역들이 폐지되면서 창락역도 폐지되었다.

창락역의 위치는 현재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 창락리에 해당한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여지도서(輿地圖書)』
  • 정요근, 「高麗·朝鮮初의 驛路網과 驛制 연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8.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