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원(利太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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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한성부 목멱산 남쪽에 설치한 반공반사(半公半私)의 숙식 제공 시설.

개설

조선시대에는 공무 여행자 및 일반 행인을 위해 도로변이나 하천, 고개 등의 교통로에 원(院)을 설립하여 숙박 등의 편의를 제공하였다. 원에는 원주(院主)를 두었으며, 원전(院田)을 지급하여 그 소출을 비용에 충당하게 하였다. 이태원(利太院)은 목멱산 아래, 오늘날의 서울특별시 용산구 한강로 이태원동에 있었던 원으로, 동대문구 제기동의 보제원(普濟院), 서대문구 홍제동의 홍제원(弘濟院), 성동구 행당동의 전곶원(箭串院)과 더불어 도성 주변에 위치한 중심 원이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이태원이 정확히 언제 설립되었는지 알 수 없다. 다만 조선 건국 직후인 1392년(태조 1)에 도평의사사배극렴·조준 등이, 각 도(道)와 주(州)에 원관(院館)을 짓거나 수리하여 행인에게 편의를 제공할 것을 건의했다는 기록으로 미루어(『태조실록』 1년 9월 24일), 도성을 건설하고 도성과 지방의 도로망을 조성하기 시작한 태조 때부터 세종대 사이에 설립되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1426년(세종 8)에 백언(白彦)이라는 사람이 수원부로 부친을 뵈러 갈 때 윤봉(尹鳳) 등이 이태원에서 전송했다는 기록을 통해(『세종실록』 8년 5월 15일), 1426년에 이미 이태원이 설치되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태원은 기본적으로 여행자에게 숙박 등의 편의를 제공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특히 공무 여행자를 위한 숙박 시설로, 영남대로(嶺南大路)로 향하는 첫 번째 원으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이태원 명칭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조선초기에는 ‘이태원(李泰院)’으로 불렀는데, 산에서 맑은 샘물이 솟아나 도성 안의 부녀자들이 빨래터로 이용하였고 소나무 숲이 우거져 있었다고 한다. 또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한성부 역원 조에는, 임진왜란이 끝난 뒤 귀순한 왜인을 이타인(異他人)이라고 불렀으므로, 이것이 마을 이름이 되었는데, 뒤에 이름을 고쳤다고 되어 있다. 왜인들과의 혼혈인이 거주한 곳이라고 해서 이태원(異胎院)이라고 불렀다고도 한다. 그 뒤 효종 때, 이곳에 배나무가 많다고 하여 오늘날의 표기인 이태원(梨泰院)으로 바꾸었다고 전한다.

조직 및 역할

조선시대의 원은 교통로 주변에 원우(院宇)를 짓고, 원을 관리할 원주를 두고, 원전을 지급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러나 이태원의 원우 규모나 원주의 파견, 원전의 경영 실태 등에 관한 자료는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양주의 녹양(綠楊) 목장 안에 설치된 광제원(廣濟院)과 광인원(廣仁院)에 원주와 주민 4~5호(戶)가 살고 있으며 집 앞에 텃밭이 있다는 기록으로 미루어(『성종실록』 16년 3월 25일), 어느 정도의 건물과 토지가 지급되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태원은 숙박 시설로서의 역할뿐 아니라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는 구휼 기관으로서의 역할도 수행하였다. 1436년(세종 18)에 도성 안과 밖에서 굶주림과 염병(染病)으로 백성들이 죽어 가자, 그들을 구제하기 위해 활인원(活人院) 외에 보제원과 이태원(利泰院)에도 곡식을 내어 주거나 죽을 쑤어 주는 장소인 진제장(賑濟場)을 마련하였다(『세종실록』 18년 8월 5일). 이듬해에 한성부에서 올린 보고에는 "지난 겨울부터 보제원과 이태원 두 곳에 진제장을 설치하고 유랑하는 기민(飢民)들을 진제하니, 이를 받아먹는 자가 각각 1,000여 명이나 되었다. 매일 관가에서 한 사람마다 쌀 1되 5홉을 주고 아울러 소금과 간장을 주니, 부황으로 죽을 뻔한 사람들이 많이 와서 살아났다."(『세종실록』 19년 2월 4일)고 기록되어 있다.

이처럼 조선전기에 원이 진제장으로서의 역할을 하게 되자, 1472년(성종 3)에는 그에 따른 대책을 마련하였다. 첫째로는 수령과 관찰사로 하여금 원주의 정원을 충원하게 하였으며, 둘째, 파손된 원우는 승려를 화주(化主)로 임명하여 보수하게 하였다. 마지막으로는 원우에 늠전(廩田)을 지급해 주도록 하였다(『성종실록』 3년 2월 28일).

한편 연산군 때는 의정부 지역의 녹양역(綠楊驛)부터 광릉산(光陵山)·황산(荒山)·묘적산(妙寂山)·광진(廣津)·한강(漢江)·왕심리(往心里) 일대까지를 모두 금표(禁標) 안에 포함시켰는데, 이태원을 통과하는 교통로만큼은 통행을 허락하였다(『연산군일기』 10년 10월 10일). 이태원로가 교통로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변천

일제강점기에 작성된 「조선총독부 중추원 역원 조사표」에 따르면, 이태원은 목멱산 남쪽의 한성부 고양군(高陽郡) 한지면(漢芝面) 이태원리(梨泰院里)에 있었다고 한다. 오늘날의 이태원은 광복 이후 문화촌 또는 해방촌으로 불리다가, 인근에 위치한 주한미군사령부의 영향으로 이태원 상가가 형성되면서 새로운 상업 문화 및 관광의 명소로 발전하였다.

참고문헌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건설부 국립지리원, 『韓國地名要覽』, 건설부 국립지리원, 1983.
  • 박경룡, 『서울史話』, 정음문화사, 1986.
  • 박재덕, 「한국전통숙박시설의 변천에 관한 연구-조선시대의 院을 중심으로-」, 경기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84.
  • 원영한, 「朝鮮時代 交通路와 驛.院制의 考察 -西北路와 東北路를 中心으로 -」, 『鄕土史硏究』7, 1995.
  • 최재경, 「조선시대 院에 대하여」, 『영남사학』4, 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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