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국협회(皇國協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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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8년(광무 2) 고종의 친위세력인 황실 및 정부 관료들이 보부상을 조종하여 구성한 단체.

개설

대한제국 정부에서 독립협회 등의 민간단체를 견제하고 정부의 시책을 옹호하는 방안으로 설립한 어용단체이다. 협회의 주요 구성원은 보부상으로 개항 이후 상업계에서 퇴락하던 와중의 상인 계층이었다. 이들은 황제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과 제국체제의 옹위를 위해 협회를 구성했다고 했다. 그러나 독립협회를 공격하여 사단을 만들어서 정부에 의해 모든 협회가 해산하자, 황국협회도 함께 사라지게 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1894년(고종 31) 청일전쟁 이후 조선에서는 일본 상인이 대거 진출하여 개항장 중심의 무역뿐만 아니라 도성 내에 상설점포를 개설하는 등 활발하게 움직였다. 이러한 외국상인의 상권침탈에 속수무책이던 국내 상인들은 급격하게 몰락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정에서 새로 성립한 대한제국 정부는 무너진 상업체제를 부활하기 위해 갑오개혁 때 해체되었던 보부상 등 전통 상업기구의 부활과 보호문제를 새롭게 거론했다. 이러한 배경에서 1898년 6월 30일 원세성(元世性), 강창희(姜昌凞) 등이 발기인이 되어 황국협회를 결성했다. 같은 날 경무청의 경무사신석희(申奭熙)가 이를 인가했고, 7월 2일 황태자가 협회경비로 1,000원을 주었다. 7월 7일 훈련원에서 발회식(發會式)을 가졌다. 황국협회는 “나라를 문명부강하게 하는 도리는 황실을 존숭하고 충군(忠君)하는 대의로 밝힌다”라고 설립 취지를 밝혔다.

초대회장은 전 농상공부 대신정낙용(鄭洛鎔), 시종이기동(李起東)을 부회장, 궁내부 참리관(參里官)현영운(玄暎運)을 총무위원으로 선출했다. 9월에는 법부(法部)의 민사국장(民事局長)이기동이 수천 명의 보부상을 일시에 회원으로 가입시켜 조직력을 강화하고 스스로 회장이 되었으며, 중추원(中樞院) 일등의관(一等議官)고영근이 부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조직 및 역할

황국협회는 ‘황실위숭(皇室爲嵩) 충군애국(忠君愛國)’을 목적으로 내세우며, 상업활동에 관한 규칙을 농상공부에 청원하여 인가를 받았다. 주요활동은 민선의회 설치운동과 상업단체 복설운동이었다. 황국협회에서는 1898년 10월 12일 민선의원 설립의 건백서를 정부에 올렸다. 그들은 “국세를 떨쳐 일으키고 나라를 부강하게 하려면 민선의원을 개설해야 한다”라고 주장함으로써, 황권강화를 통한 군주의 절대화뿐 아니라 다양한 각 계층의 의견을 수렴할 수 있는 하원개설을 통한 부국강병을 계획했다. 이에 대한 정부의 입장은 ‘민도가 아직 유치하여 불가하다’는 것이었으므로, 민선의원 설립운동은 더 이상 진전되지 못했다.

황국협회는 각 도·군 지회를 설립하여 농상대신과 상공국장에게 농상공광(農商工鑛) 사무를 황국협회가 관장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황국협회는 정치단체의 성격이 강하며 서울을 중심으로 활동이 이루어지고 있어 전국 보부상의 상업활동을 체계적으로 지원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변천

정부의 보호하에 설립되어 활동했던 황국협회는 정부정책을 비판하는 독립협회에 대항하는 역할도 했다. 특히 독립협회가 일반 대중의 호응에 힘입어 기세가 커져 반정부적 양태를 보임에 따라 지지를 보내던 고종도 그 억제책을 강구하게 되었다. 이때 서재필이 미국으로 퇴거되자 정부 내 세력자인 심상훈(沈相薰), 민영기(閔泳綺), 윤영선(尹英善), 조병식(趙秉式) 등이 길영수(吉永洙), 유기환(兪箕煥), 현영운, 이기동, 정응설(鄭應卨), 김연식(金璉植), 김규필(金圭弼) 등에게 연락해서 보부상을 중심으로 한 황국협회를 조직하고 충훈부 내에 공관을 두게 했다. 고종은 보부상을 정부 산하에서 조정하기 위해 조병식을 도존위(都尊位), 이시우(李時宇)를 부존위(副尊位)로 삼아 형을 집행할 수 있는 권한을 주기도 하였다.

독립협회가 만민공동회를 통해 정부정책을 규탄하자, 조병식과 법무협판겸황국협회 회장 이기동이 모의하여 독립협회가 고종을 물리치고 공화체제로 나라의 체제를 변화시킬 목적으로 활동하고 있다는 벽서를 붙였다. 이 벽서를 구실로 정부는 독립협회 간부 17명을 검거하고 11월 15일 독립협회를 비롯한 모든 사회단체의 해산을 선포했다. 이에 만민공동회는 부당한 탄압에 항거하여 조병식·이기동 일파의 처벌과 헌의6개조(獻議六個條)의 조속한 실시, 독립협회의 복설을 강력히 주장하는 집회를 매일 종로에서 개최했다. 당시 11월 하순에 보부상들은 폐지된 상공국(商工局)의 부설을 정부에 청원한다고 입성하였다. 그리고 11월 21일 서문 밖에서 축하회를 연다고 하고는 수천의 군중을 몰아서 독립관을 불의에 습격하여 서문 밖과 덕수궁 인화문 일대가 아수라장이 되어 인명이 다치고 가옥이 파괴되었다. 양 협회의 난투가 그치지 않자 26일 고종이 돈례문(敦禮門) 밖으로 백관을 이끌고 가서 양측 대표에게 칙유를 내리고 앞서 만민공동회에서 올렸던 사안을 시행하겠다고 선언하여 양 협회는 싸움을 멈추었다.

이후 정부는 12월 25일 군대를 동원하여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를 강제 해산시켰다. 독립협회가 강제 해산된 뒤에는 황국협회도 해산되었다. 당시 외국인들은 고종이 정부 주도가 아닌 민간에서 시위를 전개하고 정부 시책에 간여하는 것이 위험하다는 것을 인지하고 협회들을 해산시켰다고 하였다. 황국협회의 회원들이 고종에게 복설을 위한 상소를 지속적으로 올렸으나 모두 거절되었다.

보부상들은 1898년 황국협회와 상무소(商務所)가 해체된 뒤에 1899년 3월 상무회사(商務會社)를 설립하고, 1899년 5월 상무사장정(商務社章程)이 만들어짐에 따라 상무사(商務社)를 설립하였다. 상무사는 시전상인을 제외한 보부상만의 조직으로 서울에 본사, 지방에 지사를 두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주한일본공사관일기(駐韓日本公使館日記)』
  • 『독립신문(獨立新聞)』
  • 조재곤, 「한말 근대화 과정에서의 보부상의 조직과 활동」, 『백산학보』41,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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