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미술품제작공장(漢城美術品製作工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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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년 대한제국 황실의 어용 물품을 제작하기 위해 궁내부 내장원에서 만든 미술품제작소.

개설

일반적으로 이왕직미술품제작소(李王職美術品製作所)로 불렸던 미술품제작소는 설립되는 1908년부터 1913년 5월까지 한성미술품제작소(漢城美術品製作所) 시대, 1913년 6월부터 1922년 8월까지 12년간의 이왕직미술품제작소 시대, 1922년 8월 16일에 주식회사 조직의 민간회사로 전환되어 1936년 7월 13일 폐쇄되기까지의 주식회사조선미술품제작소(株式會社朝鮮美術品製作所) 시대로 구분할 수 있다. 하지만 위의 시대 구분은 각 시대의 성격을 파악하여 편의상 구분하고 명명했을 뿐 정확히 미술품제작소의 이름이 시대명과 일치하지는 않는다.

설립 경위 및 목적

한성미술품제작소는 1908년(융희 2) 10월 한성미술품제작공장으로 설립되어 1909년부터 본격적인 영업을 시작하였다. 대한제국 황실에서 무이자로 대여한 자본금 6만 원을 기초로, 당시 서울의 유력상인인 이봉래(李鳳來), 백완혁(白完爀), 이건혁(李健赫), 김시현(金時鉉) 등 4명이 각각 1만 원씩 출자하여 총 10만 원의 자본금으로 설립되었다. 그동안 왕실 소용기물을 제작해온 수공업 생산체제의 해체와 더불어 생산수단의 기계화 단계에서 산출된 공산품의 지적 퇴조현상에 대응하여 왕실 고유의 전통기물을 제작하려는 실질적 필요성에서 창립되었다.

조직 및 역할

변천

1. 한성미술품제작소 시대

한성미술품제작소는 1908년 10월 한성미술품제작공장으로 설립되어 1909년부터 본격적인 영업을 시작하였다. 대한제국 황실에서 무이자로 대여한 자본금 6만 원을 기초로, 당시 서울의 유력상인인 이봉래, 백완혁, 이건혁, 김시현 등 4명이 각각 1만 원씩 출자하여 총 10만 원의 자본금으로 설립되었다. 이렇게 설립된 미술품제작소는 이전 영선사(營繕司) 건물을 수리하여 사용하였다. 내장원(內藏院)에서는 1907년 폐지된 영선사를 대신하여 왕실 소용 물품을 제작하는 기구로 미술품제작소를 설립한 것이다. 한성미술품제작공장 이사장에는 이봉래가 임명되었다. 그는 1909년 초에 일본으로 ‘미술공예 시찰’을 다녀왔다(1909년 2월 9일 궁내부 명령). 미술품제작소의 조직은 도안실, 제작실, 사무실 등 3실 체제였다. 비교적 충분한 재력을 가지고 시작되었음에도 매달 1,000원 내외의 결손을 보았다. 수공업체계에 익숙해 있던 작업자들이 새로운 생산체계에 적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결국 1912년부터 구황실(이왕가)로부터 7년간 1만 원씩 보조를 받게 되었다(『순종실록부록』 4년 2월 18일). 그러나 이러한 황실의 보조금 지원에도 불구하고 경영은 호전되지 않았다. 결국 1913년 6월부터 이왕직에서 2만 4,000원에 인수하여 직영하게 되었다(『순종실록부록』 6년 6월 5일).

2. 이왕직미술품제작소 시대

1913년 5월부터 한성미술품제작소의 업무에 관한 인수인계가 이루어져 그해 6월 5일 한성미술품제작소의 수령회원(首領會員)인 이봉래와 이왕직 사무관이 입회한 후 최종 인계가 완료되었다. 인수 가격은 2만 4,000원이었다. 이때부터는 이왕직 직영 한성미술품제작소가 되었다. 인수한 직후인 1913년 10월 23일부터 30일까지 한성미술품제작소 시대에 생산된 제작품으로 금은보석, 직물, 주조물, 필묵, 대리석 등을 거의 원가로 일반에 판매했는데, 1원에 대해 경물권(景物券)을 주어 호황을 이루었다. 1910년대 후반에는 제작시설이 나전칠기, 목공, 제묵(製墨), 주금(鑄金), 단금(鍛金), 보석, 조각, 입사(入絲), 도자(陶磁), 두석(豆錫), 염직(染織)의 11개부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금속공예 관계가 6부로 압도적이었다. 또한 이 시기에는 일본인 중심의 판매조직이 결성되어 일반 판매에 나섰고, 중개상인들과는 별도로 미술품제작소 건물 한켠에 직매장을 개설하여 판매를 겸하였다. 예컨대 1921년 상반기의 경우 총 10만 6,500여 원에 달했는데, 구매자는 97~98% 정도가 일본인으로 토산품이나 증답품으로 구입하는 경우가 많았다. 구황실(이왕가)에서 내리는 각종 기념품이나 구황실에 바치는 각종 헌상품 또한 미술품제작소에서 만들어 바쳤고, 1915년 공진회나 1920년 후쿠오카[福岡] 공업박람회 등에 출품하는 물품의 경우에도 역시 미술품제작소에서 만들었다. 1917년 7월 1일부터는 미술품제작소의 운전자금을 2만 원으로 증액하였고, 보조금은 지급 7년도부터 1,000원씩 체감하여 11년도에 이르러서는 폐지하기로 했다(『순종실록부록』 10년 7월 1일).

3. 주식회사조선미술품제작소 시대

이왕직미술품제작소는 이왕직이 직영하고 있으면서도 일반에 판매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는 경영상 이왕직 직제에 반하는 점이 있다고 하여 그것을 민간사업으로 넘겨야 한다는 주장이 이전부터 제기되었다. 1922년 2월부터 러시아 무역상 가토 준키치[加藤巡吉]가 미술품제작소를 매수하기로 결정하고, 이를 수행할 조직으로 가토는 도미타 기사쿠[富田儀作], 스스무 다츠마[進辰馬] 외 4명과 함께 100만 원의 주식회사를 발기했다. 미술품제작소의 토지 2,300평을 15만 원에, 가옥과 기존 생산제품 및 기계 전부를 14만 원에 인수하기로 하고, 조직 또한 그대로 승계하기로 했다. 창립총회는 1922년 8월 16일 경성구락부에서 개최되었다. 조선미술품제작소의 영업목적은 미술공업품의 제작 및 판매, 그리고 미술공업품 제작용 원료의 제조 및 판매 등이었다. 총주식 2만 주 중 5,000주(전액 불입)는 이왕직에게 양도했는데, 이왕직에게 지불할 인수대금 중 10만 원으로 이를 대신하였다. 나머지 1만 5,000주는 4분의 1불입으로 발기인과 찬성인이 인수했다. 창립 당시의 총불입액은 43만 7,500원이었다. 이에 대해 미술품제작소와 관계가 많은 금은공조합(金銀工組合)에서 일본인이 발기하는 회사 설립에 극력 반대했으나 회사는 그대로 설립되었다.

생산시설이 들어 있는 미술품제작소 관내에 병설했던 직매장에서는 고객 유치를 위해 휴일을 일요일에서 월요일로 옮겼고, 같은 해 11월에는 남대문 문파밀(文巴密)호텔에 조선미술공예품진열관을 개관하면서 판매에 더욱 주력하였다. 이 진열관은 주식회사로의 개편에 주도적 역할을 했던 도미타 기사쿠가 미술품제작소 생산품의 전문매장으로 설치한 것이었다. 이 시기의 제품은 상업주의적 영향을 깊게 받았고, 전반적으로 일본화 경향이 심화되었다. 회사의 영업 성적이 192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쇠퇴하기 시작했고, 1930년대에는 소강 상태를 보였다. 결국 1936년 7월 13일 해산총회를 끝으로 조선미술품제작소 시대 또한 막을 내리게 된다. 한편, 미술품제작소의 부지 2,300평은 동양척식주식회사 조선지사가 자사 개축을 위해 매입하였다.

참고문헌

  • 『동아일보』 1922년 2월 3일자; 1922년 2월 15일자; 1922년 2월 28일자; 1922년 8월 7일자; 1922년 8월 18일자; 1936년 7월 15일자.
  • 『매일신보』 1913년 6월 1일자; 1913년 6월 3일자; 1913년 6월 7일자; 1913년 10월 28일자; 1915년 9월 22일자; 1919년 4월 3일자; 1922년 1월 24일자.
  • 『황성신문』 1909년 2월 27일자.
  • 서지민, 「이왕직미술품제작소 연구: 운영과 제작품의 형식」, 이화여자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5.
  • 최공호, 「‘이왕직미술품제작소’ 연구」, 『고문화』34, 한국대학박물관협회, 1989.
  • 中村資良 編, 『朝鮮銀行會社要錄』 1923년판, 東洋經濟時報社, 19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