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순현(和順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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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화순군에 설치된 조선시대 지방 관청이자 행정구역 명칭.

개설

고려 1390년(고려 공양왕 2)에 나주목 관할이던 화순현에 감무를 파견하고 남평을 겸임하였다. 조선이 건국한 후 1394년(태조 3)에 다시 분리시켜 두 현을 만들고, 동복감무가 화순을 겸임하였다. 1405년(태종 5)에는 동복을 화순현에 합치고 화순감무라 불렀다. 1407년(태종 7)에 이름을 복순현으로 고쳤다. 1416년(태종 16)에 화순현과 동복현을 각각 복구해서 현감(縣監)을 두었다. 1455년(세조 1)에 화순현이 전라도 나주도(羅州道)의 좌익을 맡았다. 1457년(세조 3)에는 화순현이 전라도 7진 가운데 하나인 광주진에 속했다. 1594년(선조 27)에 화순현을 능성현에 편입시켰다가, 1611년(광해군 3)에 다시 화순현을 설치하였다. 1655년(효종 6)에는 화재로 전패(殿牌)를 태운 일로 동복현이 폐지되고 화순현에 편입되었다. 1664년(현종 5)에 동복현이 다시 설치되었다. 1895년(고종 32)에 8도제가 폐지되고 23부제가 시행되면서 화순현이 폐지되고 화순군이 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고려사』에는 940년(고려 태조 23)에 여미현(汝湄縣)을 화순현으로 이름을 고친 것으로 되어 있다. 화순현은 나주목 소속이었다가 나중에 원래대로 능성현 소속이 되었다. 1390년에 화순현에 감무를 두고 남평을 겸임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1394년에 이것을 쪼개서 두 현을 만들고, 동복감무가 이를 겸임하였다. 1405년에는 동복을 없애고 화순현에 합쳐 소속시키고 화순감무라고 일컬었다. 1407년에 두 고을의 뒷 글자를 한 자씩 따서 이름을 복순(福順)으로 고쳤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1416년에 화순현과 능성현이 합쳤다고 되어 있다. 이때 두 고을의 뒷 글자를 한 자씩 따서 순성(順城)으로 이름을 고치고 현령으로 하였다(『태종실록』 16년 10월 10일). 1418년(태종 18)에는 두 곳으로 다시 분리하여 화순현이 되었다.

조직 및 역할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화순현에 종6품 현감 1인과 종9품 훈도(訓導) 1인을 둔다고 되어 있다. 화순현감은 종6품 병마절제도위(兵馬節制都尉)를 겸하고 그 밑에 중앙 관제와 마찬가지로 이·호·예·병·형·공으로 6방을 두었다. 화순현은 현감 아래 향청(鄕廳)의 향임(鄕任)으로 좌수(座首)와 별감(別監) 등을 두었다. 이들은 6방을 나누어 장악하여 현감의 지방 행정을 보좌하였다. 향임은 대부분 부세의 분배와 징수, 향풍의 교정, 향리의 감찰 등을 맡았다.

변천

화순과 능성, 화순과 동복이 통합되었다가 분리된 적이 있었다. 1594년에 화순현을 능성현에 편입시켰다. 이것은 왜란 때 화순현이 입은 피해가 커서 일시적으로 조치를 한 것이다. 1610년(광해군 2)에 화순현을 다시 설치하였다. 임진왜란 때 폐지되었다가 20년 만에 다시 설치된 것이다(『광해군일기』 2년 12월 26일) (『광해군일기(중초본)』 2년 12월 26일). 『증보문헌비고』에는 그 시기가 1611년으로 되어 있다. 1655년에는 동복이 화순에 편입된 일이 있었다. 『대동지지』에 따르면 화재로 전패를 태운 사건이 발생하여 동복현이 폐지되고 화순현에 편입되었다. 그 뒤 1664년에 다시 동복현이 설치되었다. 『여지도서』에는 그 시기가 1663년(현종 4)으로 되어 있다.

1455년에 각 도의 내지(內地)에도 거진(巨鎭)을 설치하고 주변의 여러 고을을 중·좌·우익으로 나누어서 소속을 정하였다. 이때 화순현을 전라도 나주도의 좌익으로 삼았다(『세조실록』 1년 9월 11일).

1457년에는 각 도의 좌·우·중익을 폐지하고 거진을 설치하였다. 이른바 진관(鎭管) 체제로 바뀌면서 전라도에는 7곳에 거진이 설치되었는데 화순현이 광주진에 속했다(『세조실록』 3년 10월 20일).

진관 체제는 그 뒤로도 조금씩 변화를 거치면서 『경국대전』에 수록되었다. 화순이 속한 광주진은 충좌위의 우부(右部)인 나주진관으로 편입되었다. 이로써 5개 거진을 중심으로 그 아래 여러 진에 편제된 내륙과 연해 지역의 육군과 수군이 전라도의 방위를 맡았다.

조선후기에는 나주거진이 전라우영(全羅右營)으로 바뀌었다. 우영(右營)의 속읍은 나주·광주·능주·영암·영광·화순·남평·무안·함평·무장 10곳이며, 우영의 병수(兵數)는 마병(馬兵) 5초(哨), 속오(束伍) 52초, 표하군(標下軍) 210명, 당보군(塘報軍) 120명, 수솔군(隨率軍) 865명으로 되어 있다.

1873년(고종 10)에 해안 방어를 강화하면서 전라좌수영(全羅左水營)에 별포군(別砲軍) 46명을 추가로 설치하였을 때, 화순현에도 20명을 두었다(『고종실록』 10년 2월 27일).

1895년에 8도제가 폐지되고 23부제가 시행되면서 화순현이 폐지되고 화순군이 되었다. 1896년(고종 33)에 전국 23부를 다시 13도로 개정할 때 전라남도와 전라북도가 분리되었다. 전라남도는 수부(水府)를 광주에 두었으며, 화순군을 비롯한 32개 군과 제주목의 1목으로 편성되었다. 이때도 화순군은 4등군이었다. 1908년(순종 1)에 화순군이 능주군에 합병되었으며, 1913년에는 능주군이 화순군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 『경국대전(經國大典)』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금성일기(錦城日記)』
  • 『칙령(勅令)』
  • 『관보(官報)』
  • 『대동지지(大東地志)』
  • 『여지도서(輿地圖書)』
  • 『의안·칙령(議案·勅令)』
  • 『호남읍지(湖南邑誌)』「나주목여지승각(羅州牧輿地勝覺)」
  • 『읍지(邑誌)』[사(四) 전라도(全羅道) ①], 아세아문화사 영인본, 1983.
  • 김정호, 『지방 연혁 연구-전남을 중심으로』, 광주일보출판국, 1988.
  • 박종기, 『지배와 자율의 공간, 고려의 지방사회』, 푸른역사, 2002.
  • 손정묵, 『한국지방제도·정치사연구(상)-갑오경장~일제강점기-』, 일지사, 2001.
  • 이수건, 『조선시대 지방행정사』, 민음사, 1989.
  • 이존희, 『조선시대 지방행정제도 연구』, 일지사, 1990.
  • 『마을유래지』, 화순군, 1995.
  • 『전라남도지』, 전라남도지편찬위원회, 1993.
  • 『전라북도지』, 전라북도, 1989.
  • 『화순군사』, 화순군사편찬위원회, 19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