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묘장(種苗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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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년(융희 2) 농상공부에서 전국 각 지역에 종자와 종묘를 육성하고 배부하기 위해 설치한 농업 연구시설.

개설

대한제국기 전국 각지의 풍토와 기후, 농업 상황에 따라 종자와 종묘의 육성 및 경종법의 개발을 위해 설치한 농업 시험연구소이다. 종묘장에는 권업모범장과 원예모범장에서 시험한 결과 한국에 적당하다고 인정된 종자와 종묘를 배부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따라서 종묘장은 우량종자의 생산을 꾀하면서 인근 농촌에 종묘를 보급 및 관리하는 역할을 하였다. 종묘장 이외에 1908년부터 농사시작장(農事試作場)을 두어 종묘장이 설치되지 않은 지역의 농사 조사, 종묘 배급, 지도 장려를 담당하였다. 농사시작장은 미곡 집산지인 청주, 김제, 영변, 온성 등에 설치되었다. 1910년 (융희 4) 2월에는 잠종, 종금, 종묘의 배부와 단기강습 및 순회강화, 현지지도 등의 직접적인 농사 지도를 담당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통감부에서는 한국 재래종이 생산력이 떨어지고 일본 미곡시장에서 높은 가격으로 수출될 수 없기 때문에 종묘장을 설치해서 한국에 일본종을 보급하여 일본 수출 농산품을 증대시키고자 했다. 따라서 종묘장의 종자와 종묘는 대부분 일본 품종이었다.

조직 및 역할

1908년 3월 9일 칙령 13호로 종묘장관제(種苗場官制)를 공포하고 경상남도 진주, 함남 함흥 2개소에 종묘장을 설치하였다. 진주종묘장에는 장장(場長)에 기수 마치다 에이고로[町田永五郞], 다나카 신타로[田中信太郞]가 배치되었다. 함흥종묘장 장장에는 기수 사다노 슈이치[定野秀一]가 배치되었다. 1908년 3월 25일 농상공부 고시(告示) 제5호로 농상공부 소관 종묘장의 위치와 명칭을 고시하였다. 1909년 2월에는 전라북도 전주, 전라남도 광주, 황해도 해주, 평안북도 의주, 함경북고 경성에 종묘장을 증설하면서 기수 21명을 늘였다. 1910년 2월 5일 충남 공주에, 3월 17일에는 춘천에 종묘장을 두었다. 종묘장이 증가됨에 따라 1908년부터 매년 1회 농상공부에서는 지방의 농업기술관을 소집하여 한국농업기술관회의(韓國農業技術官會議)를 개최하였다. 회의에서는 농정 방침의 고시, 기술관의 지방 농업 자문, 경향 농업정보의 교환 등이었다. 특히 종묘장을 통한 개량품종의 도입과 종묘장 증설이 논의되었다. 1908년 12월 제1회 회의에서 농업기술관들은 각 도에 종묘장을 설치하여 종묘의 양성, 배부, 농사 및 잠업 강습생의 양성과 농업지도의 임무를 담당하게 하였다.

종묘장의 역할과 기능은 칙령 13호의 7개조의 종묘장관제에 잘 드러났다.

1조) 종묘장은 농상공부 대신의 관리에 속하고 종자와 종묘의 육성 및 배부의 사무를 담당한다.

2조) 각종 종묘장에 장장, 기수 전임 4인(판임), 서기(판임)

3조) 장장은 기수로써 충당하고 농상공부 대신의 지휘와 감독을 받아 종묘장의 제반 사무를 관장하여 처리한다.

4조) 기수는 상관의 지휘를 받아 기술에 종사한다.

5조) 서기는 상관의 지휘를 받아 서무에 종사한다.

6조) 서기는 당분간 기수로써 겸임시킨다.

7조) 종묘장의 명칭과 위치는 농상공부 대신이 정한다.

변천

1912년 3월 30일 조선총독부에서는 도종묘장(道種苗場) 설치 및 종묘장보조비(種苗場補助費) 교부 규정을 관보에 공포하여 4월 1일부터 시행하였다. 따라서 대한제국기 종묘장은 식민지기에도 총독부에 소속되어 계속 이어졌다고 본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대한제국 관보(大韓帝國 官報)』
  • 국사편찬위원회 편, 『고종시대사』, 국사편찬위원회, 1968~1971.
  • 김도형, 『일제의 한국 농업정책사 연구』, 한국연구원,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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