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담현(龍潭縣)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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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용담현 |
한글표제 | 용담현 |
한자표제 | 龍潭縣 |
상위어 | 전라도(全羅道) |
동의어 | 물거(勿居), 옥천(玉川), 청거(淸渠) |
관련어 | 이지험(李之馦) |
분야 | 정치/행정/관청 |
유형 | 집단·기구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조선 |
집필자 | 정성일 |
폐지 시기 | 1895년(고종 32)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용담현(龍潭縣)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세종실록』 12년 1월 21일, 『인조실록』 24년 4월 5일, 『인조실록』 24년 4월 10일, 『효종실록』 6년 1월 3일, 『세조실록』 1년 9월 11일, 『세조실록』 3년 10월 20일, 『고종실록』 10년 2월 27일 |
전라북도 진안군 용담면 일대에 설치된 조선시대 지방 관청이자 행정구역 명칭.
개설
본래는 백제의 물거현(勿居縣)으로 고려 1313년(고려 충선왕 5)에 용담현령(龍潭縣令)으로 고쳤다. 조선이 건국한 후에도 이것이 이어졌다. 1409년(태종 9)에 용담현이 관할해 오던 1향을 용담현에 편입하였다. 1455년(세조 1)에 용담현이 전라도전주도(全州道)의 좌익을 맡았다. 1457년(세조 3)에는 용담현이 전라도 7진 가운데 하나인 전주진에 속했다. 1646년(인조 24)에 용담의 읍격이 현령에서 현감으로 내려갔다가, 1655년(효종 6)에는 원래대로 복구되었다. 1873년(고종 10)에 해안 방어를 강화하면서 전라좌수영(全羅左水營)에 별포군(別砲軍) 46명을 추가로 설치하였을 때, 용담현에도 20명을 두었다. 1895년(고종 32)에 8도제가 폐지되고 23부제가 시행되면서 용담현이 폐지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고려사』에는 진례현 관할이던 청거현을 1313년에 용담현으로 이름을 바꾸고 현령을 두었다고 되어 있다. 조선이 건국한 후에도 이것이 이어졌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1409년에 도관찰사(都觀察使)윤향(尹向)이 건의하여, 수령이 파견되지 않은 전라도의 현과 향·소·부곡은 거의 모두 본 고을에 합쳐졌다. 이때 용담현이 관할해 오던 1향이 폐지되어 용담현의 직촌(直村)이 되었다. 1향은 동향(銅鄕)이다.
조직 및 역할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용담현에 종5품 현령 1인과 종9품 훈도(訓導) 1인을 둔다고 되어 있다. 현감은 종6품 병마절제도위(兵馬節制都尉)를 겸하였다. 훈도는 5백 호 이상인 고을에는 모두 두기로 한 것에 따른 것이다(『세종실록』 12년 1월 21일). 용담현령 밑에 중앙 관제와 마찬가지로 이·호·예·병·형·공 6방을 두었다. 현령 아래 향청(鄕廳)의 향임(鄕任)으로 좌수(座首)와 별감(別監) 등을 두었다. 이들은 6방을 나누어 장악하여 현령의 지방 행정을 보좌하였다. 향임은 대부분 부세의 분배와 징수, 향풍의 교정, 향리의 감찰 등을 맡았다.
변천
『증보문헌비고』에 따르면 1646년에 용담현감으로 읍격을 낮추었다. 이것은 이지험(李之馦) 등이 일으킨 역모의 후속 조치였다(『인조실록』 24년 4월 5일) (『인조실록』 24년 4월 10일). 1655년에는 10년이 되었다는 이유로 원래대로 복구했다(『효종실록』 6년 1월 3일). 그런데 『증보문헌비고』에는 그 시기를 1656년(효종 7)으로 적고 있어서 1년 차이가 있다.
1455년에는 각 도의 내지(內地)에도 거진(巨鎭)을 설치하고 주변의 여러 고을을 중·좌·우익으로 나누어서 소속을 정하였다. 이때 용담을 전라도 전주도의 좌익으로 삼았다(『세조실록』 1년 9월 11일).
1457년에 각 도의 중·좌·우익을 폐지하고 거진을 설치하였다. 이른바 진관(鎭管) 체제로 바뀌면서 전라도에는 7곳에 거진이 설치되었는데 용담현은 전주진(全州鎭)에 속했다(『세조실록』 3년 10월 20일).
진관 체제는 그 뒤로도 조금씩 변화를 거치면서 『경국대전』에 수록되었다. 충좌위의 중부(中部)에는 전주진관의 군사가 편성되었다. 이로써 5개 거진을 중심으로 그 아래 여러 진에 편제된 내륙과 연해 지역의 육군과 수군이 전라도의 방위를 맡았다.
조선후기에는 여산에 전라후영(全羅後營)이 설치되었다. 후영(後營)의 속읍은 여산·익산·고산·금산·진산·용안·함열·임피·옥구·용담 10곳이며, 후영의 병수(兵數)는 마병(馬兵) 4초(哨), 속오(束伍) 34초, 표하군(標下軍) 317명, 당보군(塘報軍) 117명, 수솔군(隨率軍) 629명으로 되어 있다.
1873년에 해안 방어를 강화하면서 전라좌수영에 별포군 46명을 추가로 설치하였을 때, 용담현에도 20명을 두었다(『고종실록』 10년 2월 27일).
1895년에 8도제가 폐지되고 23부제가 시행되면서 용담현이 폐지되었다. 1896년(고종 33)에 전국 23부를 다시 13도로 개정할 때 전라남도와 전라북도가 분리되었다. 전라북도는 수부(首府)를 전주에 두었으며, 용담군을 비롯한 26개 군으로 편성되었다. 1914년에 진안군으로 통합되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통편(大典通編)』
- 『대전회통(大典會通)』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대동지지(大東地志)』
- 『여지도서(輿地圖書)』
- 『의안·칙령(議案·勅令)』
- 박종기, 『지배와 자율의 공간, 고려의 지방사회』, 푸른역사, 2002.
- 손정묵, 『한국지방제도·정치사연구(상)-갑오경장~일제강점기-』, 일지사, 2001.
- 이수건, 『조선시대 지방행정사』, 민음사, 1989.
- 이존희, 『조선시대 지방행정제도 연구』, 일지사, 1990.
- 『전라남도지』, 전라남도지편찬위원회, 1993.
- 『전라북도지』, 전라북도, 1989.
- 『진안군사』, 진안군사편찬위원회, 19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