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모진(子母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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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명종대에 두만강 이북 이응거도(伊應巨島)에 설치한 성보(城堡).

개설

자모진은 조선시대 명종대에 두만강 이북 이응거도 지역에 설치한 성보이다. 두만강 유역에 있던 경흥(慶興) 지역이 수재(水災)를 입어 경작할 땅이 없게 되자 이응거도에 성을 쌓아 백성들을 보호하고 방어하면서 개간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응거도의 자모진 설치로 땅을 빼앗긴 여진인들이 서수라보(西水羅堡)를 침입하면서 자모진 설치의 부당성이 제기되어 철폐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자모진은 조선시대 두만강 이북 지역에 설치된 성보이다. 두만강 유역에 있던 경흥 지역이 해마다 수재가 나서 그 지역 백성이 계속 굶주림에 시달리자, 조정에서는 두만강 건너편 이응거도에 자모진을 설치하고 농사를 짓도록 하였다. 이로써 경흥 사람들이 이로움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방어하는 데 있어서도 유리하게 되었다.

자모진의 설치 시기에 대해서는 1552년(명종 7) 5월(『명종실록』 7년 5월 25일), 『학봉일고(鶴峯逸稿)』권3 「북정일록(北征日錄)」에 나오는 대로 1554년 1월 등의 기록이 있으나, 1551년 12월에 이미 잉거도(仍巨島, [이응거도])에 진(鎭)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어(『명종실록』 6년 12월 22일) 1551년 12월 이전에 자모진을 설치한 것으로 보인다.

조직 및 역할

자모진 설치에 있어 주도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함경북도병사김순고(金舜皐)와 경흥부사김수문(金秀文)이었다. 이들은 경흥 지역 수해의 대비책으로 두만강 이북 이응거도에 대한 경작과 방어 시설의 필요성을 보고하여 우선 목책(木柵)을 세울 것을 허락받았다. 그렇지만 실제로 이응거도에 축성된 진은 석성(石城)이었고, 관사(館舍)까지 완성되었다. 자모진의 정확한 크기는 알 수 없지만, 비슷한 시기에 경흥진이 4,225척이고, 경흥진에 소속된 서수라보는 1,270척, 조산보는 1,622척, 무이보는 3,900척, 아오지보는 3,379척이었기 때문에 최소 1,000척 이상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당시 이응거도에 대해서 여진인들의 땅이며 그들의 생활 공간을 빼앗는다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에, 진을 설치하면 조선과 여진인들이 땅을 다투는 흔단(釁端)이 있게 될 것이라는 우려가 있었다(『명종실록』 7년 8월 16일). 이것을 보면 자모진은 설치된 후 이응거도에 경작할 땅을 개척하면서 백성들을 보호하며 방어하는 역할을 담당하였음을 알 수 있다.

변천

자모진 설치 후 여진인들의 서수라보 침입이 있었다. 서수라보를 침입한 여진인들은 골간올적합(骨看兀狄哈)의 수적(水賊)으로 자피선(者皮船) 200여 척을 타고 침입하였다. 이때 포로로 잡힌 조선 백성이 150명이라는 기록이 있다(『명종실록』 8년 12월 9일). 한편 『제승방략』에는 이 침입으로 조선인 80여 명이 사로잡혔고, 5명이 죽었으며, 말 13마리와 소 14마리가 약탈당하였다고 되어 있다. 또한 이때 경흥부사김수문은 새로 설치한 이응거도의 자모진에 대한 방어에 치중하여 서수라보의 적변을 막지 못한 것으로 되어 있다.

서수라보 침입은 여진의 땅인 이응거도에 진을 설치하고 경작하면서 여진인들을 내쫓은 것에 기인한 것으로 조사되었다. 즉 이응거도에서 여진인 50여 가구 혹은 15~16가구를 쫓아냈는데, 이에 대해 여진인들이 분을 내어 변을 일으킨 것으로 판명되었다. 결국 조정의 의견은 모두 신진(新鎭)인 자모진을 버리는 것으로 모아졌고(『명종실록』 7년 10월 13일), 자모진은 철폐되었다. 자모진 철폐에 대한 시기는 정확하게 나타나지 않지만 『학봉일고(鶴峯逸稿)』에는 진이 설치된 지 2년 만에 철폐된 것으로 나타나며, 이것은 여진인들의 서수라보 침입 직후로 추정된다.

한편 여진의 서수라보 침입은 조선의 초곶(草串) 정벌의 계기가 되었고, 이것은 다시 여진인들의 조산보(造山堡) 침입을 불러왔다. 결국 조산보 침입을 주도한 시라손(時羅孫)이 조선으로 귀순하면서 여진의 침입과 조선의 정벌은 일단락되었으나, 조선과 여진인 사이에 변흔(邊釁)이 생긴 것은 이응거도에 진을 설치한 것에서 비롯되었다는 평가를 받게 되었다(『명종실록』 9년 1월 5일).

참고문헌

  • 『퇴계선생문집(退溪先生文集)』
  • 『학봉일고(鶴峯逸稿)』
  • 『제승방략(制勝方略)』
  • 『북관읍지(北關邑誌)』
  • 『함경도읍지(咸鏡道邑誌)』
  • 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 『한국 군사 인물 열전 : 조선편Ⅰ』, 2011.
  • 한성주, 「조선 명종대 두만강 이북 지역에 대한 ‘진(鎭)’ 설치 시도 : 이응거도(伊應巨島)의 자모진 설치와 여진과의 분쟁을 중심으로」, 『한일관계사연구』42, 2012.
  • 河內良弘, 『明代女眞史の硏究』, 同朋舍出版, 1992.
  • 河內良弘, 「中宗·明宗時代の朝鮮と女眞」, 『朝鮮學報』82, 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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