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첩식(筆帖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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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금~청시기 문서와 장적을 관장하던 이들을 지칭하던 호칭.

개설

만주어로 문서를 뜻하는 ‘비트허(bithe)’에 뿌리를 둔 비트허시([筆帖式], bithesi)를 가리키는 말로 문서와 장적을 관장하던 사람이다. 본디 문서와 장적을 관장하던 이들을 지칭하던 호칭으로, 이후 내무부(內務府)·호부(戶部)·이번원(理藩院)·도찰원(都察院) 등 청대 중앙과 지방의 여러 아문에 소속되어 한문·만문 문서의 기록과 번역을 담당한 관직의 명칭으로 정립되었다. 정식 독음은 필특혁희(筆特赫希) 또는 필특혁식(筆特赫式)이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관직 명칭으로서의 필첩식은 1629년 문관(文館, [bithei yamun])이 설립될 당시 한문 서적의 번역과 정치에 관한 기록을 담당하도록 각기 4명씩을 선발한 것이 시작이었다. 이후 1644년 청의 입관(入關) 이후 만·한 관료 및 문서의 병용으로 관련 업무가 방대해지면서 중앙 아문 및 성경(盛京)과 각 성(省) 등에도 다수의 필첩식이 임용되어 원활한 문서 행정을 도모하였다.

조직 및 역할

필첩식은 입관 이전부터 여러 아문에 설치되어 있었다. 1631년 6부를 설치하고 관제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필첩식이 배치되었으며, 1636년에는 도찰원에도 필첩식이 배정되었다. 입관 이후에는 중앙 아문 및 성경과 각 성 등에도 다수의 필첩식이 임용되면서 규모가 더욱 커졌다. 이들은 상대적으로 하급인 5품에서 9품 사이로 규정되었지만 이후 중요한 지위로 승진할 기회를 갖고 있기도 하였다.

필첩식은 각 지방의 요지에도 배치되어 만·한 문서의 작성과 번역, 보관 등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도 필첩식을 통한 문서 작성 및 전달 행위가 발견되며(『숙종실록』 38년 6월 3일), 조선에서는 이들을 녹사(錄事)에 비견할 만한 직책으로 이해하였다(『정조실록』 23년 7월 10일).

이들은 만주 팔기(八旗)나 몽골 팔기 소속 보쇼쿠([領催], bošoku), 푼더 보쇼쿠([驍騎校], funde bošoku) 등에서 선발되었으며, 정보의 누설을 방지한다는 목적 아래 소속 지역이나 부서에 관계없이 사실상 상관의 개인 수행원에 가까운 역할을 수행하는 경우가 많았다. 1661년에는 번역고시(飜譯考試, [ubaliyambume simnen])라는 제도가 도입되었다. 한문 고전의 만주어 번역 능력을 평가하는 이 시험을 통과하면 비트허시 등의 관직에 임명될 수 있었는데, 이 시험은 만주인이 관직 진출 과정에서 한인과의 경쟁을 피할 수 있는 유용한 대안을 제공하였다.

변천

만주문자의 활용 빈도가 차츰 감소하면서, 도광제시대에 접어들면 내무부나 이번원처럼 만주문자의 활용도가 높은 일부 관서 소속을 제외한 대부분의 필첩식은 사실상 최고 7품까지 승진할 수 있는 단순 잡무 처리직으로 전락하였다.

참고문헌

  • 『만문노당(滿文老檔)』
  • 마크 엘리엇 저, 이훈·김선민 역, 『만주족의 청제국』, 푸른역사, 2009.
  • 최진규, 「청의 중국 지배와 필첩식」, 『중국사연구』 46,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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