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리원(平理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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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시기에 최고 재판소 역할을 담당하던 기구.

개설

평리원은 1899년(광무 3) 고등재판소를 계승하여 최고 재판소로 설립되었다. 각급 재판소의 상소심 재판뿐만 아니라 특별히 지시된 죄인을 심판하였다. 그런데 경우에 따라서 평리원 재판장은 법부 대신의 지령을 받게 되어 있었기 때문에 두 기관 간의 갈등이 생겨났다. 1907년(융희 1) 12월 평리원은 폐지되고 일본식 명칭인 대심원(大審院)으로 바뀌었다. 이때는 이미 통감부가 법무 보좌관을 통해 재판에 개입하고 있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1895년 3월 25일 법부 관제와 함께 재판소 구성법이 반포되면서 근대적 재판 기관이 설립되기 시작했다. 1896년 8월까지 지방재판소, 한성재판소 및 개항장재판소, 순회재판소, 고등재판소, 특별 법원의 5종이 구성되었다. 이 가운데 고등재판소와 한성재판소는 실제로 설치·운영되었다.

고등재판소는 법부 건물 내에 설립되었고, 각급 재판소의 상소심 재판뿐만 아니라 칙임관·주임관의 범죄, 국사범(國事犯)에 관한 재판을 담당하였다. 이는 고등재판소가 최고 재판소이기도 하지만 이전 제도에서 의금부가 담당했던 국왕 재판소로서의 기능까지 겸하게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대한제국의 황제권 중심 체제가 본격화하던 1899년 5월 재판소 구성법 개정에 의해 고등재판소는 평리원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본래 법부 개정안에서는 일본 재판소 이름인 대심원으로 되어 있었는데 최종안에서 평리원으로 바꾸었다.

조직 및 역할

1899년 5월 30일 개정된 재판소 구성법에 따르면, 각 지방재판소와 개항 시장 재판소를 관할하여 해당 재판소 판결에 불복한 상소를 처리하고, 특지(特旨)로 왕이 특별히 지시한 죄인을 심판하도록 규정되었다. 직원은 재판장 1인, 판사 4인, 검사 3인, 주사 10인, 정리(廷吏) 4인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에 따라 특지로 왕이 특별히 지시한 죄인 안건, 칙임관·주임관의 체포와 심판, 국사범 심판은 재판장이 법부 대신에게 보고하여 지령을 받아 처리하도록 하였다.

한편 평리원 재판장이 법부 대신의 지령을 받도록 한 규정 때문에 독립적인 평리원 운영에 장애가 생겼다. 법부의 재판 개입으로 인해 평리원의 위상은 낮아졌다. 그러나 법부의 개입이 항상 부당한 것은 아니었다. 평리원 사법관들의 부정행위도 종종 있었기 때문이다.

변천

1904년 1월 일부 관제가 변경되어, 이전 고등재판소의 예에 따라 재판장을 법부 대신 혹은 법부 협판 가운데 임명하고, 판사 중 1인은 법부 칙임관·주임관 가운데 겸임하도록 하였다. 평리원이 법부에 종속됨을 공식화하는 조치인 셈이다. 그러나 이 법령은 1904년 5월 28일 취소되었다.

평리원은 1907년 12월 23일 재판소 구성법이 새로 공포되면서 폐지되고, 일본식 명칭인 대심원으로 바뀌었다. 대심원에 소속된 판검사는 대부분 일본인이었고, 이러한 재판소마저도 1909년 10월 31일을 기해 완전히 폐지되고 말았다.

참고문헌

  • 『한말근대법령자료집(韓末近代法令資料集)』
  • 『관보(官報)』
  • 도면회, 「1894~1905년간 형사재판제도 연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