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인현(慈仁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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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경상북도 경산시 자인면 지역을 중심으로 편성되었던 조선시대의 관청이자 행정구역.

개설

자인현(慈仁縣)은 신라시대의 노사화현(奴斯火縣)에서 기원하며, 신라 경덕왕 때 자인현으로 개명되어 고려시대까지 이어졌다. 신라 경덕왕 때는 장산군(獐山郡: 현 경상북도 경산시 일대)의 영현(領縣), 고려시대에는 경주(慶州)의 속현(屬縣)으로 존재하였다. 자인현은 조선시대에 경주에 병합되었다가, 1637년(인조 15)에 고을 사람들의 요청으로 경주로부터 분리·독립하였다. 1653년(효종 4)에는 옛 구사부곡(仇史部曲)의 영역을 병합하여 읍세를 확장하였다. 1895년(고종 32)에 자인군이 되었으나, 1914년에 경산군에 합병되었다. 조선시대에 자인현은 현재의 경상북도 경산시 자인면 지역을 중심으로 편성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자인현은 신라시대의 노사화현에서 기원하며, 신라 경덕왕 때 자인현으로 개명되었다. 고려시대에도 명칭의 변화가 없었으며, 1018년(고려 현종 9)에 경주의 속현이 되었다. 조선시대에도 그대로 경주에 소속되어 경주의 영역 내로 병합되었다가, 1637년(인조 15)에 고을 사람들의 요청(『인조실록』 11년 1월 8일)을 받아들여 경주로부터 분리되었고, 현감(縣監)이 파견되었다.

조직 및 역할

자인현은 신라 경덕왕 때 9주 중 양주(良州)의 관할하에 있던 장산군의 영현으로 편성되었다. 당시 자인현에는 지방관으로 소수(少守) 혹은 현령(縣令)이 파견되었다. 고려시대에는 경주의 속현이 되어 자인현에는 별도의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았다. 그 대신 읍사(邑司)가 설치되어 토착의 향리(鄕吏)들이 자치적으로 지방 행정업무를 수행하였다. 조선시대에는 토착 향리의 자치적인 역할은 사실상 소멸되고 경주부윤(慶州府尹)의 직접적인 통제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조선전기에 편찬된 『세종실록』「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모두 자인현이 경주부의 속현(屬縣)으로 기재되었으나, 사실상 경주에 합병되었던 것이다. 1637년(인조 15)에 자인현이 재건된 후에는 별도의 현감이 파견되었다. 18세기에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의하면 자인현에는 6품의 문관(文官)이 현감으로 임명되며, 좌수(座首) 1명, 별감(別監) 2명, 군관(軍官) 30명, 인리(人吏) 27명, 지인(知印) 12명, 사령(使令) 15명, 관노(官奴) 15명, 관비(官婢) 11명이 편성되었다. 『대전회통(大典會通)』에도 자인현에는 종6품의 현감이 임명된다는 내용이 있다. 조선시대 자인현의 읍치와 관아는 현재 경상북도 경산시 자인면 일대에 위치하였다.

변천

1653년에는 옛 구사부곡의 영역이 경주에서 자인으로 이속되어 자인의 읍세가 확장되었다. 옛 구사부곡의 영역은 현재의 경상북도 경산시 진량면 현내리와 그 주변 지역에 해당하며, 18세기의 자료인 『호구총수(戶口總數)』에는 하북면 지역으로 기록되었다. 자인현은 1895년에 전국을 23부로 나누었을 때 자인군이 되어 대구부(大邱府)의 관할에 속했다. 1896년(고종 33)에 13도제가 실시되면서 자인군은 경상북도 관할의 4등군으로 편제되었다. 하지만 자인군은 1914년에 일제가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경산군에 병합되었다. 옛 자인현 지역은 현재 경상북도 경산시 자인면과 그 주변 지역에 해당한다.

참고문헌

  • 『삼국사기(三國史記)』
  • 『고려사(高麗史)』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志)』
  • 『대동지지(大東地志)』
  • 『신구대조조선전도부군면리동명칭일람(新舊對照朝鮮全道府郡面里洞名稱一覽)』
  • 『여지도서(輿地圖書)』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호구총수(戶口總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