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목(公州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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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공주시에 설치한 조선시대 지방 관청이자 행정구역 명칭.

개설

공주목(公州牧)은 고려 983년(고려 성종 12)에 처음으로 전국에 12목을 설치할 때 설립되었다. 당시 충청도에서는 유일하게 설치된 목이었다. 조선시대에는 충주, 청주, 홍주와 함께 충청도 4대 목 중의 하나였다. 1602년(선조 35)부터 1895년(고종 32)까지는 충청감영의 소재지였다. 15세기에 인구는 2,167호, 10,049명이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토지는 18,526결인데, 논이 3/8 정도였다. 1914년의 지방행정구역 통폐합 때 충청남도 공주군이 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삼국시대에 공주의 명칭은 웅진(熊津)이었다. 475년(백제 문주왕 1)에 고구려의 공격으로 백제의 수도인 한성이 함락되자 문주왕이 웅진으로 천도하였다. 538년(백제 성왕 16)에 성왕이 다시 부여의 사비로 천도할 때까지 63년간 백제의 수도로서 기능하였다. 백제의 왕궁 터는 지금의 공산성(公山城) 안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웅진은 금강과 산으로 둘러싸인 지역으로 교통의 요지이면서 군사적 요충지였다. 이것이 백제가 웅진으로 천도한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공산성을 중심으로 한 분지는 방어에는 유리하지만, 수도로 삼기에는 좁은 편이었다. 이에 성왕이 사비로 천도하였으나 군사적 중요성 때문에 웅진은 유사시에 사비를 방어하고, 수도의 역할도 하는 제2의 수도와 같은 지위를 지녔다. 당나라가 사비성을 포위하자 의자왕은 웅진으로 피하여 저항하였다. 당나라가 백제를 정복한 뒤에는 이곳에 웅천도독부(熊川都督府)를 두었다.

통일신라시대에 신문왕은 웅천주를 설치하고 도독을 두었다. 고려에 들어와 940년(고려 태조 23)에는 웅주를 공주로 바꾸었다. 이때 처음으로 공주라는 명칭을 사용하였다. 983년(고려 성종 12)에 12목을 설치할 때 목으로 승격하였다. 1012년(고려 현종 3)에 전국 군현을 군사구역으로 개편할 때 절도사 지역이 되어 명칭을 공주안절군(公州安節軍)이라고 하였다. 1018년(고려 현종 9)에는 지주사로 강등되었다. 1341년(고려 충혜왕 복위 2) 원나라 활활치평장(闊闊赤平章)의 아내가 된 경화옹주(敬和翁主)의 외가가 있는 곳이라는 이유로 다시 목으로 승격했다.

조선시대에도 공주를 목으로 유지하였다. 15세기에 신풍·유성·덕진을 공주의 임내로 삼았고, 유성의 부곡이었던 이인과 미화를 공주에 소속시켰다. 공주목은 충청도 행정의 중심지이면서 특히 공산성을 거점으로 군사 중심지로 기능하였다. 임진왜란 때는 공산성에 명나라군의 지휘부가 설치되었고, 의병들의 집결지이기도 하였다. 1624년(인조 2)에 이괄의 군대가 한성을 위협하자 인조는 2월 13일에 공주 공산성으로 피신하여 18일까지 거주하였다(『인조실록』 2년 2월 13일) (『인조실록』 2년 2월 18일). 한말에는 동학농민군이 공주로 진격하면서 공주 우금치 고개에서 격전을 벌였다.

조선후기에 공주는 경제와 교통의 중심지로서 더욱 중요한 기능을 하였다. 공주는 물산이 많고 땅이 넓은 지역으로 알려졌다. 『여지도서(輿地圖書)』에서 공주의 풍속은 남자는 쟁적(筝笛) 즉 악기 연주를 좋아하고, 여자는 가무를 좋아한다고 하였다. 이것은 시장이 활발하고 왕래가 많아지면서 대중의 여흥이 발달한 것을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조직 및 역할

수령은 정3품 목사를 두었다. 『속대전(續大典)』에서는 관찰사가 목사를 겸하게 하였다. 목사 아래에 종5품 판관 1명을 두었는데, 18세기에는 음서 출신자를 임명하였다. 『여지도서』를 살펴보면, 속관으로 좌수 1명, 별감 3명, 군관 70명, 아전 68명, 지인 29명 사령 32명, 관노 41명, 관비 16명, 기생 23명이 있었다. 세조 때 진관 체제를 시행하면서 목에는 종3품 첨절제사를 두었다. 공주진관에서 종4품 동첨절제사진을 둔 지역은 임천과 한산이었다. 종6품의 절제도위를 둔 진관은 전의, 정산, 은진, 회덕, 진잠, 연산, 노성, 부여, 석성, 연기였다. 한편 공주진의 판관이 절제도위를 겸하였는데 조선후기에는 폐지하였다.

영장제를 시행하면서 충청도의 전·후·좌·우·중에 5명의 영장을 설치했는데, 공주에는 우영장겸토포사를 배치하였다. 영장의 휘하에 진영군관 10명, 토포군관 30명, 기패관 25명, 교사 10명, 진영리 5명을 두었다.

변천

18세기에 공주목에는 24개 면이 소속되었다. 가호는 편호로 15,602호, 인구는 남자 21,411명, 여자 21,210명이었다. 『여지도서』에 의하면, 토지는 밭이 15,164결, 논이 7,259결로 15세기에 비해 약간 증가했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1602년(선조 35)에 충주에 있던 감영이 공주로 이전하였다. 이후 1895년(고종 32)의 갑오개혁 때까지 공주는 충청감영의 소재지였다. 그러나 이 기간 중에 단기간이지만 공주는 여러 번 강등과 승격을 반복하였다.

1646년(인조 24)에 역적의 출신지라는 이유로 공주목을 공산현으로 강등하고, 공청도(公淸道)를 홍청도(洪淸道)로 고쳤다(『인조실록』 24년 5월 1일). 1662년(현종 3)에는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분실했다는 이유로 공산현으로 강등하였다(『현종개수실록』 3년 3월 26일). 1679년(숙종 5)과 1778년(정조 2)에도 각각 공산현으로 강등하였다가 얼마 뒤에 승격하였다.

1896년(고종 33)에 충청도를 충청남도와 충청북도로 분리하면서 공주부로 승격하여 27개 군을 통솔하였다. 그러나 1914년에 지방제도를 통폐합할 때 공주의 면리를 주변의 연기, 대전, 부여 등에 떼어 주고 공주군으로 축소하였다. 1932년에는 충남도청도 대전으로 이전하였다.

참고문헌

  • 『속대전(續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대동지지(大東地志)』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여지도서(輿地圖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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