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친부(宗親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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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친을 관리·감독하며, 역대 왕의 계보·초상화를 보관하고 왕과 왕비의 의복을 관리하던 관서.

개설

조선시대 종친부는 종친에 대한 관리를 위해 설치된 관서이다. 이는 태종이 종친을 한편으로는 예우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통제·감시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다. 종친부는 설립 이후 정치와 일정하게 거리를 두면서, 종친에 대한 관리와 이를 위한 선원록(璿源錄) 편찬을 주관하였고, 각종 왕실 행사에 참여하였다. 고종대 흥선대원군에 의해 종친부가 확대·개편되면서 종친의 정치적 역할이 증대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종친에 대한 관리는 고려시대에는 제왕자부를 통해서 이루어졌다. 조선 건국 후에는 이를 계승하여 재내제군소(在內諸君所)를 설치하였다. 재내제군소의 설치는 조선 건국 직후의 정치 상황과 관련되어 태종에 의해서 추진된 것이었다. 두 차례 왕자의 난을 겪은 뒤, 대군(大君)과 여러 군(君)을 궁궐 한곳에 모아 그들을 신료들과 달리 예우하면서 정치적으로 감시하려는 의도였던 것이다. 1412년(태종 12) 5월에는 궐내에 있는 군 가운데 태조의 후손이 아닌 경우는 봉군을 금지하도록 하였다.

이후 1414년 2월 종부시를 재내제군소에 부속되도록 하여 종친들의 잘못을 규찰하도록 하였으나, 종부시는 이후 독립 아문으로 분리되었다. 이로써 재내제군소는 딸린 하급 관청이 없는 관서가 되었다가 1430년(세종 12) 하급 관청을 붙이면서 동시에 명칭도 종친부로 바꾸었다. 이때 종친부는 실권은 없으나 같은 정1품 아문인 의정부보다 서열을 높여 명실상부한 조선의 최고 관서가 되었다.

조직 및 담당 직무

조선시대 종친의 봉작호는 1398년(태조 7) 친왕자는 공(公)으로, 여러 종친은 후(侯)를 사용하였다. 1401년 공·후 등의 봉작호가 참람하다고 하여 이를 대신해 대군·군·원윤·정윤으로 바꾸었다.

이후 대군이나 군의 작호는 그대로 유지되는 가운데 원윤과 정윤은 변하였다. 1443년 12월, 1품 이상은 경(卿), 2품 이상은 윤으로, 3품 이상은 정(正), 4품 이상은 영(令), 5품 이상은 감(監)으로 개칭되었다. 즉, 왕의 친아들이나 친형제는 대군·군으로, 그리고 승습하지 않는 여러 아들[非承襲衆子]은 경·윤으로 봉작했다.

1457년(세조 3) 이후 경과 윤은 각각 경·부경과 윤·부윤으로 분리되거나 개정되면서 경·윤이 없어지고 정3품 당상관에 도정이 신설되었다. 이전의 정이 정3품 당하(堂下)로 정해졌고, 정4품직에 수, 종4품직에 부수가 신설되었다. 앞서의 4품직이었던 영·부령은 5품직이 되고 5품의 감·부감이 6품직으로 강등되었다.

세조대 일련의 개편 과정을 거친 직제가 이후 『경국대전』에 그대로 규정되었다. 즉 대군(大君)·왕자군(王子君)은 별도의 품계가 없고, 대군의 적장자는 종1품 군에 제수되며, 세자의 중자(衆子)·대군의 적장손(嫡長孫)·왕자군의 적장자는 정2품 군에 제수되었다. 세자의 중손(衆孫)·대군의 중자와 적장증손(嫡長曾孫)·왕자군의 적장손은 종2품의 군에 제수되었다. 이 밖에 세자의 중증손(衆曾孫)·대군의 중손·왕자군의 중자와 적장증손은 정3품 당하관에, 대군의 중증손·왕자군의 중손은 종3품 부정에 제수되었으며, 왕자의 중증손은 정4품 수에 제수되었다.

이 밖에도 부속으로 전첨사를 설치하고, 전첨 1명, 전부(典簿) 1명을 두었다. 전첨과 전부는 음서로 들어온 관리를 제수하다가 뒤에 전첨을 혁파하고 유사당상 3명을 품계가 높은 종친 가운데 뽑았다. 이속(吏屬)은 서리가 10명, 고직 4명, 사령 15명, 군사 6명이었다.

종친부는 정치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대군·왕자군·왕손 등의 입학례나 관례를 주관하였고, 혼례 때는 주혼당상(主婚堂上)으로 참여하였다. 또한 매년 초 종묘에 참배[展謁]하거나 각종 제향에 참여하였고, 진향(進香)에도 참여하였다. 또한 시·원임대신이 왕의 안부[問候]를 여쭐 때 함께 참석하였고, 대전이나 중궁전·왕비전·각 전(殿)의 탄신 때 전문(箋文)을 올리기도 하였다. 이 밖에도 어진(御眞)의 봉심이나 왕과 왕비의 옷[衣襨]을 관리하였다. 19세기부터는 기존의 종부시에서 관장하던 선원록(璿源錄) 편찬에도 관여하였다.

관사는 한성부 북부 관광방(觀光坊: 현 종로구 중학동·가회동·재동 일대)에 있었다.

변천

고종 즉위 후 흥선대원군이 종친의 정치적 역할을 강조하면서 종친부가 강화되었다. 1864년(고종 1) 종부시를 합병하였고, 1865년에 도정 1명이 추가로 설치되었으며, 1869년 종친부에 대한 대대적인 개편 작업이 이루어졌다. 그리하여 영종정경·판종정경·지종정경·종정경 등이 신설되었는데, 영종정경은 대군과 왕자군이 겸하도록 하였고, 판종정경은 적왕손과 왕손이 겸하였다. 자급(資級)이 해당되는 대원군봉사손(大院君奉祀孫)도 겸할 수 있었다. 지종정경은 정2품에서 정1품까지의 종친이, 종정경은 종2품의 종친에게 배정되었다. 이 밖에도 정4품 전첨 1명, 정5품 전부 1명, 정6품 주부, 정7품 직장, 종7품 부직장, 정8품 봉사, 종8품 부봉사, 정9품 참봉 등을 신설하였다. 대신 부정·수·부수·영·부령·감 등의 직제는 혁파되었다. 1894년 이후 종정부(宗正府)가 설치되면서 종친부는 폐지되었다.

의의

종친부는 종친에 대한 예우를 위해 설치한 관서이다. 그러나 동시에 왕권에 위협이 될 수 있는 이들 종친에 대한 감시와 통제를 목적으로 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육전조례(六典條例)』
  •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考)』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김성준, 『한국중세정치법제사 연구』, 일조각, 1985.
  • 김병우, 「흥선군의 종친 및 종친부 재건책」, 『조선사연구』11, 2002.
  • 남지대, 「조선초기 예우아문의 성립과 정비」, 『동양학』24, 1994.
  • 연갑수, 「19세기 종실의 단절 위기와 종친부 개편」, 『조선시대사학보』51,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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