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부(全州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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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전주시에 설치된 조선시대 지방 관청이자 행정구역 명칭.

개설

전주부(全州府)는 조선시대 전라도관찰사의 영문(營門), 즉 전라감영의 소재지였다. 고려 1356년(고려 공민왕 5)부터 완산부(完山府)로 불리던 것을 조선이 건국한 후 1392년(태조 1) 8월에 왕의 고향이라는 이유로 완산유수부(完山留守府)로 승격시켰다. 1413년(태종 13)에는 완산부를 전주부로 개칭하였다. 1895년(고종 32)에 8도제가 폐지되고 23부제가 시행되면서 전주부가 폐지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전주목은 고려가 본격적으로 지방에 외관을 파견하여 983년(고려 성종 2)에 설치한 전국 12개 목(牧) 가운데 하나이다. 1018년(고려 현종 9)에 12목이 8목으로 조정될 때도 전주목은 주목(主牧)의 하나였다. 같은 해에 강남도(江南道)와 해양도(海陽道)를 합하여 전라도(全羅道)라 하였다.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를 낭주(朗州: 현 전남 영암)에서 전주로 옮기면서 전주목을 안남대도호부(安南大都護府)로 승격하였다. 1022년(고려 현종 13)에는 안남도호부가 다시 수주(樹州: 현 인천 부평)로 이전되면서 전주목으로 되돌아갔다. 1355년(고려 공민왕 4)에는 전라도안렴사(全羅道按廉使)정지상(鄭之祥)이 행패를 부리던 원나라 사신 야사불화(埜思不花) 등을 잡아 가둔 일로 전주목이 부곡(部曲)으로 강등되었다. 다음 해에 다시 완산부로 개칭하였다.

조선 건국과 함께 1392년 8월에 전주목을 완산유수부로 승격시키고 유구(柳玽)를 부윤(府尹)으로 삼았다(『태조실록』 1년 8월 7일). 『세종실록』「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그 이유를 전주가 이른바 선원(璿源)의 땅, 즉 왕의 고향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1403년(태종 3)에는 전주부로 고을 이름을 고쳤다고 하였다. 그런데 전주부로 명칭이 바뀐 것은 1413년 10월로 완산부가 전주부로 바뀌고 유수(留守)가 윤(尹)으로 개칭 환원되었다. 전주를 완산부라고 고친 뒤에도 전주와 나주의 첫 글자를 딴 전라도라 부르고 있어서 혼란스럽다는 이유였다(『태종실록』 13년 10월 15일).

조직 및 역할

『세종실록』 「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전주부에 종2품인 부윤 1원 외에 부윤의 부관(副官)에 해당하는 종5품 판관(判官)과 종6품 교수(敎授)를 각각 1원씩 두는 것으로 규정되었다. 『증보문헌비고』에 따르면 전라도에 병마절제사 1원을 두었는데, 전주부윤(全州府尹)이 그것을 겸임하였다.

전주부윤은 관찰사가 겸한 적도 있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었다. 관찰사가 부윤을 겸할 때는 문음(文蔭) 종5품직 판관이 실제 통치를 맡았다. 조선초기에는 판관이 전주부에 설치되었다. 판관은 조선중기에 이르러서는 제주(濟州)와 경성(鏡城)을 제외하고는 모두 폐지되었다. 즉 1462년(세조 8)에는 전주도 경주와 마찬가지로 판관이 폐지되었다(『세조실록』 8년 7월 14일).

『증보문헌비고』에는 전주판관의 설치에 대한 내용이 있다. 1454년(단종 2)에 판관을 파하였다가 1601년(선조 34)에 다시 두었으며, 1607년(선조 40)에 파하였다가 1655년(효종 6)에 원래대로 되돌렸다. 1666년(현종 7)에 파하였다가 1670년(현종 11)에 다시 두었고, 1756년(영조 32)에 폐지하였다가 1759년(영조 35)에 다시 환원하였다.

『완산지』에 따르면 전주부판관의 관속(官屬)은 좌수(座首) 1원, 별감(別監) 3원, 군관(軍官) 126원, 인리(人吏) 152원, 지인(知印) 77원, 사령(使令) 43원, 일수(日守) 7원, 관노(官奴) 44원, 기생(妓生) 34원, 관비(官婢) 28원 총 515원에 이른다. 또 『완산지』는 전주부의 조경묘(肇慶廟)와 경기전(慶基殿)에 배속된 489명의 직임을 보여 준다. 전주이씨의 시조를 모신 조경묘에는 음직 종5품인 영(令) 1원, 문반 종8품 별검(別檢) 1원, 수복(守僕) 135원, 금화군(禁火軍) 40원 총 177원이었다. 태조이성계의 영정이 모셔진 경기전은 음직 종5품 영 1원, 음직 종9품 참봉(參奉) 1원, 수복 210원, 금화군 100원 총 312원이었다.

변천

전주부윤을 전라도관찰사가 겸임하는 문제는 시기에 따라 변화가 있었다. 여기에는 원칙적으로 임기 1년인 감사를 더 오래 근무하게 하려는 구임(久任) 문제, 감사가 가족을 데리고 부임할 수 있게 허락하는 솔권(率眷) 문제, 감사와 부윤을 맞이하고 보내는 데 따르는 비용 문제 등이 얽혀 있었다.

1448년(세종 30)에는 다른 도와 마찬가지로 전라감사기건(奇虔)이 전주부윤을 겸하였다(『세종실록』 30년 7월 25일). 1454년(단종 2)에 이를 원래대로 환원하였는데, 그해 8월에 노숙동(盧叔仝)을 전라도관찰사로, 변효문(卞孝文)을 전주부윤으로 각각 제수한 것에서 알 수 있다(『단종실록』 2년 8월 5일).

1594년(선조 27) 5월에도 홍세공(洪世恭)을 전라도관찰사에 제수하면서 전주부윤을 겸하게 하였다(『선조실록』 27년 5월 28일). 그런데 홍세공은 한 달 뒤인 6월에 부윤을 다시 설치해야 한다는 내용의 장계를 올렸다. 전라도관찰사가 처리할 관무(官務)가 많아 전주부의 일까지 함께 볼 여력이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러면서 부윤을 따로 두게 되면 그에 따른 비용이 추가로 소요된다는 점을 덧붙였다(『선조실록』 27년 6월 21일).

1662년(현종 3) 11월에 부임하여 1664년(현종 5) 3월에 이임한 조귀석(趙龜錫)도 전라도관찰사로서 전주부윤을 겸하였다. 그는 1663년(현종 4) 6월에 부윤을 다시 설치할 것을 요청하였다(『현종실록』 4년 6월 16일). 1664년 3월에 부임한 전라도관찰사정만화(鄭萬和)는 1665년(현종 6) 3월에 이임하였는데, 그는 부윤을 겸하고 식솔들을 거느렸다. 그가 재임하던 1664년 9월에 겸임 제도가 폐지되어 다시 이원정(李元禎)이 전주부윤으로 임용되었다(『현종개수실록』 5년 9월 29일).

이처럼 관찰사의 부윤 겸임과 환원의 반복은 그 뒤에도 이어졌다. 『증보문헌비고』에는 1756년에 감사와 부윤의 겸직을 파하였다가, 1759년에 다시 부윤을 겸하게 했다는 내용이 있다.

1455년(세조 1)에는 각 도의 내지(內地)에도 거진(巨鎭)을 설치하고 인근 고을을 익(翼)에 분속시켰다. 바다와 인접한 곳은 그 전부터 진(鎭)을 설치하고 진장(鎭將)을 두어 방어하였지만, 내륙의 주현(州縣)에는 아직 진이 설치되지 않았다. 그래서 전주를 비롯하여 여산·익산·금구가 전라도 전주도(全州道)의 중익을 맡았다(『세조실록』 1년 9월 11일).

1457년(세조 3)에 각 도에 중·좌·우익을 폐지하고 거진을 설치하였다. 행정 구역상의 도(道)와 군사 조직 단위인 도가 혼동을 일으켰는데, 이제는 군사 명칭의 도는 사라지고 진만 사용하게 되었다. 이른바 진관(鎭管) 체제로 바뀌면서 전라도에는 7곳에 거진이 설치되었는데 전주도 그중 하나이다. 전주진(全州鎭)에는 여산·용안·함열·익산·고산·금산·무주·용담·진안·금구·태인이 속했다(『세조실록』 3년 10월 20일).

진관 체제는 그 뒤로도 조금씩 변화를 거치면서 『경국대전』에 수록되었다. 전주진관은 충좌위의 중부(中部)에 편성되었다. 조선후기에는 전주거진이 전라중영(全羅中營)으로 바뀌었다. 중영의 속읍은 전주·김제·고부·진안·임실·금구·만경·부안 8곳이며, 중영의 병수(兵數)는 마병(馬兵) 5초(哨), 속오(束伍) 46초, 표하군(標下軍) 454명, 당보군(塘報軍) 59명, 수솔군(隨率軍) 689명으로 되어 있다.

1895년에 8도제가 폐지되고 23부제가 시행되면서 전주부가 폐지되었다. 1896년(고종 33)에 전국 23부를 다시 13도로 개정할 때 전라남도와 전라북도가 분리되었다. 전라북도는 수부(首府)를 전주에 두었으며, 전주군을 비롯한 26개 군으로 편성되었다. 1906년(고종 43)에 전주부의 월경지였던 이동면, 이서면, 이북면 3개 면이 만경군으로 편입되었다. 이로써 이른바 월경지 문제가 해소되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 『경국대전(經國大典)』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칙령(勅令)』
  • 『관보(官報)』
  • 『대동지지(大東地志)』
  • 『여지도서(輿地圖書)』
  • 『의안·칙령(議案·勅令)』
  • 김운태, 『조선왕조정치·행정사(근대편)』, 박영사, 2001.
  • 박종기, 『지배와 자율의 공간, 고려의 지방사회』, 푸른역사, 2002.
  • 손정묵, 『한국지방제도·정치사연구(상)-갑오경장~일제강점기-』, 일지사, 2001.
  • 김현영, 「『완영일록』을 통해 본 전라감영의 구조」, 『전라감영연구』(전주역사박물관·전북대 전라문화연구소), 도서출판 선명,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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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수건, 『조선시대 지방행정사』, 민음사, 1989.
  • 『완주군지』, 완주군지편찬위원회, 1996.
  • 『전라남도지』, 전라남도지편찬위원회, 1993.
  • 『전라북도지』, 전라북도, 1989.
  • 『전주시사』, 전주시사편찬위원회,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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