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해군(興海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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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흥해읍 지역을 중심으로 편성되었던 조선시대의 관청이자 행정구역.

개설

흥해군(興海郡)은 신라의 퇴화군(退火郡)에서 기원한다. 신라 경덕왕 때 의창군(義昌郡)으로 개명하여 6개의 영현(領縣)을 거느렸다. 고려시대의 흥해군은 경주(慶州)에 소속되었으며, 1172년(고려 명종 2)에 감무(監務)가 처음 파견되었다. 이후 1367년(고려 공민왕 16)에 지흥해군사(知興海郡事)로 승격하였으며, 조선시대에도 그대로 계승되었다. 15세기 중반에 지흥해군사는 흥해군수(興海郡守)로 바뀌었다. 흥해군은 이후 별다른 연혁의 변화 없이 이어지다가, 1914년에 일제가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영일군(迎日郡)에 합병되었다. 조선시대에 흥해군은 현재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흥해읍 지역을 중심으로 편성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흥해군은 신라의 퇴화군에서 기원한다. 신라 경덕왕 때 의창군으로 개명하였고, 고려초기에 흥해군이 되었다. 1018년(고려 현종 9)에 경주의 소속이 되었다. 1172년에 감무가 처음으로 파견되었고, 1367년에 국사(國師) 천희(千熙)의 고향이라 하여 지흥해군사로 승격하였다. 조선 건국 후에도 흥해군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1466년(세조 12)에 지군사를 군수(郡守)로 개칭하였다(『세조실록』 12년 1월 15일).

조직 및 역할

흥해군은 신라 경덕왕 때 9주 중 양주(良州)의 관할하에 포함되었으며, 안강(安康)·기립(鬐立)·신광(神光)·임정(臨汀)·기계(杞溪)·음즙화(音汁火) 6개 현을 영현으로 거느렸다. 흥해군에는 지방관으로 군태수(郡太守)가 파견되었다. 고려시대 흥해군은 경주의 소속으로 편성되었기 때문에 흥해군에는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았다. 그 대신 흥해군에는 읍사(邑司)가 설치되어 토착의 향리(鄕吏)들이 읍사에서 자치적으로 지방 행정업무를 수행하였다. 흥해군에는 1172년에 지방관인 감무가 처음으로 파견되었다. 1367년에는 감무가 지흥해군사로 승격하였고, 조선 건국 후에도 그대로 유지되었다. 그러나 1466년(세조 12)에 지흥해군사는 흥해군수로 변경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서 향리의 권한과 지위는 약화되고, 흥해군수에게 모든 권한이 집중되었다.

『경국대전(經國大典)』과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종4품의 군수와 종9품의 훈도(訓導)가 파견되었다. 조선후기에 편찬된 『흥해군읍지(興海郡邑誌)』에 의하면 종4품의 문관(文官) 혹은 무관(武官)이 군수로 임명되며, 좌수(座首) 1명, 별감(別監) 2명이 편성되었다. 『대전회통(大典會通)』에도 종4품의 군수가 임명된다는 내용이 있다.

변천

지흥해군사를 흥해군수로 개칭한 이후 오랫동안 흥해군과 관련된 연혁의 변동은 거의 없었다. 1895년(고종 32)에 전국을 23부로 나누었을 때 동래부(東萊府)의 관할에 속했다. 1896년(고종 33)에 13도제가 실시되면서 흥해군은 경상북도 관할의 4등군으로 편제되었다. 그러나 1914년에 일제가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영일군에 병합되었다. 조선시대에 흥해군의 관아는 현재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흥해읍 성내리에 위치하였다.

참고문헌

  • 『삼국사기(三國史記)』
  • 『고려사(高麗史)』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志)』
  • 『대동지지(大東地志)』
  • 『신구대조조선전도부군면리동명칭일람(新舊對照朝鮮全道府郡面里洞名稱一覽)』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흥해군읍지(興海郡邑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