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목(淸州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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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청주시에 설치된 조선시대 지방 관청이자 행정구역 명칭.

개설

청주목(淸州牧)은 조선시대 충청도의 계수관이 되었던 목(牧)이다. 삼국시대에는 서원경(西原京)이었다. 고려 940년(고려 태조 23)에 청주로 고쳤다. 983년(고려 성종 2)에 전국에 12목을 설치할 때 청주목을 설치하였다. 조선시대에도 이를 계승하여 유지하였다. 15세기에 가호가 1,589호, 인구가 6,738명이었다. 군정은 시위군(侍衛軍) 230명, 진군(鎭軍) 153명, 수호군(守護軍) 50명, 선군(船軍) 475명이었다. 토지는 18,193결인데, 이 가운데 논이 1/3 정도를 차지하였다. 1895년(고종 32)에 청주군이 되었으며, 1908년(순종 1)에 충청북도감영이 충주에서 청주로 이전하였다. 1946년에 청주시가 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청주목은 삼국시대에는 백제의 상당성(上黨城)이었다. 『삼국사기』와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고구려의 낭비성(娘臂城) 또는 낭자곡성(孃子谷城)을 청주로 비정하였다. 통일신라시대 685년(신라 신문왕 5)에 서원소경(西原小京)을 설치하고 서라벌의 귀족과 6부의 주민을 이주시켰다. 고려 940년(고려 태조 23)에 청주로 고쳤다. 983년(고려 성종 2)에 최승로의 건의에 따라 전국에 12목을 설치할 때 충청도에서는 청주와 충주가 목이 되었다. 그 뒤 잠시 절도사로 바뀌었다가, 1018년(고려 현종 9)에 전국의 지방행정제도를 4도호부 8목 체제로 전환할 때 다시 청주목이 되었다.

청주는 충주와 함께 충청도를 대표하는 고을이었다. 조선후기에 청주로 충청병영이 이속하면서 충청도의 군사중심지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청주의 군사적 중요성은 임진왜란 때 청주성의 상실과 탈환이 이어지면서 주목되기 시작하였다. 충청도병영은 수영과 병영이 모두 해미에 있었다. 병영이 육로와 떨어져 있고 병영과 수영이 함께 있어서 비효율적이라는 지적이 임진왜란 시기부터 대두하였다. 새로운 병영의 후보지로 청주와 충주가 지목되었다. 청주는 영남 충청도의 교차점에 있어서 은진(恩津), 금산(金山), 조령(鳥嶺), 죽령(竹嶺)에서 쳐들어오는 적을 차단하는 요충지로 지목되어 병영을 설치할 적격지로 주목되었다(『선조실록』 31년 12월 2일). 1652년(효종 3)에 충청병영이 청주로 이전되어 상당산성에 설치되었다. 병영은 병사의 거주지인 청진당(淸塵堂) 12칸, 집무실인 삼석당(三錫堂) 12칸, 아사(衙舍) 14칸, 통군루(統軍樓), 작대장교청(作隊將校廳) 6칸, 대변군관청(待變軍官廳) 9칸, 군기고 13칸과 각종 창고, 아전과 노비들의 방으로 이루어졌다.

조직 및 역할

정3품 청주목사를 두었다. 종6품 판관 1명과 유학교수관 1명을 두었는데 유학교수관은 조선후기에 폐지하였다. 관속은 좌수 1명, 별감 3명, 대동유사(大同有司) 1명, 관청(官廳) 감관(監官) 1명, 창감(倉監) 5명, 군관 55명, 아전 43명, 지인(知印) 20명, 사령 31명, 기생 14명, 관노 34명, 관비 15명이 있었다. 병영은 종2품 병마절도사 1명이 지휘하며 그 휘하에 지구관(知彀官) 2명, 기고관(旗鼓官) 2명, 친병파총(親兵把摠) 1명, 초관(哨官) 3명, 기패관(旗牌官) 6명, 대변군관(待變軍官) 180명이 있었다.

병마절도사의 보좌관으로 종3품 우후(虞候)를 두었는데 우후는 재가군관(在家軍官) 30명을 거느렸다. 그 30인 안에 병방군관(兵房軍官) 2명을 두었다. 수첩군관(守堞軍官) 250명이 있고, 그중에 병방군관 2명, 장무군관 2명, 집사 2명을 두었다. 그 밖에 군기감관 2명, 배리 2명, 지인 16명, 사령 19명, 군뢰 20명, 사천으로 급창을 겸하는 자 2명, 방자 1명, 급수비 2명, 다모비 1명이 있었다. 또 보좌관으로 심약(審藥)과 화사(畫師)를 두었다.

영장제를 시행하면서 청주에는 전·후·좌·우·중영의 5영 가운데 중영(中營)을 설치하였다. 중영에는 정3품 중영장겸토포사(中營將兼討捕使) 1명을 두었다. 그 휘하에 군관, 기패관(旗牌官), 지인 8명, 진리(鎭吏) 5명 등을 두었다.

변천

1759년(영조 35)의 기묘장적에 의하면 청주에는 총 24개 면이 있었다. 가호는 편호 12,749호, 인구는 남자 21,181명, 여자 21,729명이었다.

1658년(효종 9)에 청주에 사는 천민이 주인을 살해했다는 이유로 서원현으로 강등하였다. 1667년(현종 8)에 10년의 기한이 지나 다시 청주목으로 복구하였다. 1681년(숙종 7) 6월 24일에 청주 사람 박상한(朴相漢)의 역모 사건으로 박상한을 처형하고, 청주를 다시 서원현으로 강등하였다. 당시 충주도 충주현으로 강등되어 충청도의 도명이 공청도(公淸道)로 바뀐 상태였는데, 7월 27일에 다시 도명이 공청도에서 충홍도(忠洪道)로 바뀌었다. 1689년(숙종 15)에 청주목으로 복구하고, 충홍도도 충청도로 복구하였다.

1732년(영조 8)에 이인좌의 난이 발발하였을 때 청주가 함락되고 청주 양반이 많이 호응하여 반란의 거점이 되었다고 서원현으로 다시 강등하였다가 1740년(영조 16)에 복구하였다. 1777년(정조 1)에 역적의 고향이라고 서원현으로 강등하고 충청도를 공청도로 고쳤다가, 1786년(정조 10)에 10년의 기한이 지나서 다시 복구하였다. 1804년(순조 4)에 대역죄인 한해옥의 고향이라는 이유로 서원현으로 강등하고 도명도 공청도로 바꾸었다. 1813년(순조 13)에 복구하였으나, 1826년(순조 26)에 청주 사람 정상태·박형서 등이 홍경래의 난과 관련한 유언비어를 살포한 죄로 다시 서원현으로 강등하고 공청도로 바꾸었다. 이후 헌종대에 다시 복구하였다. 1862년(철종 13)에 다시 서원현과 공청도로 강등하였다가, 1871년(고종 8)에 다시 복구하였다.

1895년(고종 32)에 전국에 23부제를 시행할 때 청주목은 청주군이 되었다. 그러나 다음 해에 충청도가 충청남도와 충청북도로 분리되고, 1908년(순종 1)에 충청북도감영이 충주에서 청주로 이전하면서 충청북도 도청 소재지가 되었다. 1946년에 청주시가 되었다.

참고문헌

  • 『대전회통(大典會通)』
  • 『대동지지(大東地志)』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여지도서(輿地圖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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