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상업은행(朝鮮商業銀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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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9년 1월 대한천일은행으로 설립되었다가 1911년 2월 조선상업은행으로 상호를 변경한 은행.

개설

조선상업은행은 1899년(고종 36) 1월 대한천일은행으로 설립인가를 받았다. 1902년에는 영친왕(英親王)이 제2대 은행장으로 취임하였다. 1911년 2월에는 행명을 조선상업은행으로 변경하였으며, 1912년에는 한성공동창고주식회사를 합병하였다. 1917년에는 자본금을 100만 원으로 증자하면서 한국인에게만 부여했던 주주 자격을 일본인에게도 개방하였다. 이 과정에서 조선총독이 최대주주가 되고 지배인도 일본인이 맡았기 때문에 일본인 고객의 출입이 크게 늘었다. 1920년대와 1930년대를 지나면서 조선상업은행은 다수의 일본인 은행을 합병·매수하여 거대 은행으로 성장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조선상업은행의 전신인 대한천일은행은 1899년 1월 22일 탁지부 대신에게 은행 설립에 대한 청원서를 제출하였다. 설립인가는 바로 다음 날인 1월 23일에 발급되었고, 발기인 총회는 1899년 1월 29일 개최되었다. 발기인 총회도 하기 전에 1898년 12월부터 운영자금 3만 원이 전환국에 보관하던 화폐로 제공되었다. 자본금은 5만 6,000원이었고, 총주식[衿]은 112주에 불과하여 1주당 금액은 조선은행이나 한성은행 주식의 10배인 500원이나 되었다. 자본금은 절반 정도를 ‘궁내부 및 정부’에서 출자를 받고, 나머지를 일반에 공모할 생각이었다. 외국인의 주식 소유 즉 매매나 양여는 일절 금지하였다. 설립인가 후 임원을 선임한 결과 초대 은행장에 민병석(閔丙奭), 은행장 대판부장(代辦副長)에 조한근(趙漢根)이 뽑혔다. 자본금 5만 6,000원 가운데 5만 원이 납입되는 대로 개업할 예정이었으나 자본금은 쉽게 납입되지 않았다. 1899년 3월 말까지 제1회 납입금 4,800원이 들어오는 데 그쳤다. 그럼에도 이 은행은 1899년 3월 영업을 개시하였다.

조직 및 역할

대한천일은행은 정부 발행 은표(銀票), 환표(換票), 기타 상업표(商業票)의 할인과 매입, 각종 물화의 무역 및 화폐교환, 금은(金銀) 동산 정부증권 등을 담보로 한 예대(預貸) 업무 등 통상적인 일반은행 업무를 주업으로 삼았다. 정부의 위탁에 의해 태환권 발행과 공전운수(公錢運輸) 업무도 맡았다. 중앙은행이 없었던 당시에는 일반은행이 이런 정부대행 업무를 흔히 취급하였다. 1899년 3월에는 인천, 부산, 목포 등 주요 개항장 지점을, 4월에는 개성지점 설치를 인가하였다. ‘지점규칙’도 인가하여 공전수송 절차를 상세히 정하도록 했다. 천일은행은 타 은행과 달리 부동산 담보 대부의 특전도 받았다 그리고 ‘은행보호’ 명목으로 궁내부와 정부에서 ‘약간 금액을 정기 대여’받기로 한 정관에 따라 정부의 자금지원도 받았다. 경성·개성·인천의 상인들로 이루어진 대한천일은행의 경영진은 국가와 상인의 협력 관계가 은행 설립의 모태가 되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모습은 1902년 영친왕이 은행장, 광무정권의 재정관리자인 이용익이 부행장으로 취임하면서 더욱 뚜렷해졌다.

변천

1900년부터 1905년까지 대한천일은행의 납입자본금과 예금은 각각 4배가량 증가하고 배당률도 4할대를 유지하는 등 괄목할 만한 신장을 보였다. 하지만 4할대의 높은 배당은 차입금에 의한 과잉대출, 특히 방만한 어음할인에 의한 할인료 수입에서 기인했다. 하지만 1905년 6월 이후 화폐개혁, 백동화 교환, 외획 폐지 등으로 서울 상업계가 일대 혼란에 빠져 어음부도가 속출하자, 이미 상황이 어려웠던 대한천일은행은 일거에 엄청난 불량채권을 떠안으며 휴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부는 1906년 6월 5일 대한천일은행의 정리에 나섰다. 최석조(崔錫肇), 조진태(趙鎭泰), 김기영(金基永), 백완혁(白完爀) 등 10명의 정리위원을 임명하여 은행장부를 조사하게 하고 ‘대한천일은행정리요강’을 하달하였다. 정부안에 따라 자본금을 15만 원(圓) 즉 3,000주를 1주당 50원으로 하여 증자하고 정부가 무이자로 20만 원을 지원하여 은행자금을 늘렸다. 신주 인수에 편리하도록 1주 가격 500원(元), 산화로는 250원(圓)을 50원(圓)으로 개정하는 등의 조치가 이어졌다. 탁지부에서는 탁지부 서기관후지카와 리사부로[藤川利三郞], 한성공동창고(주) 지배인 이이즈미 간타[飯泉幹太] 두 사람을 파견하였다. 이들의 지휘 아래 1906년 6월 18일 정관개정과 영업재개를 신청·인가받았고, 자본금 15만 원의 제1회 납입은 6월 20일에 마쳤다. 6월 28일에는 김기영(銀行長代辦), 윤정석, 조진태, 백완혁 등 4명을 취체역으로, 이길선을 감사역으로 선출하고, 이이즈미 간타를 지배인에 선임했다. 자본금 15만 원(3,000주, 주주 188명)의 대한천일은행이 재개업했다.

화폐공황 직후 대한천일은행의 휴업·폐점과 정부정리안에 따른 재개업은 한국 근대 은행사, 금융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우선 일제는 이 은행의 휴업을 계기로 1906년 3월 ‘은행조례’를 제정하였다. 또한 일제는 공칭자본금을 훨씬 능가하는 구제자금을 지원한 대가로, 그들이 지명한 일본인을 지배인으로 밀어 넣는 한편, 향후 은행의 주요 업무를 일일이 정부에서 승인받아 시행하도록 하였다. 대한천일은행은 1909년에 자본금을 50만 원(1만 주)으로 재차 증자하였다. 이때 탁지부는 이 은행에 대한 정부대하금의 일부(2만 9,812원 50전)를 신주 인수자금으로 돌려 2,385주(1주당 불입액 12원 50전)를 인수함으로써 이 은행의 최대주주가 되었다. 이런 관계로 대한제국 황실에서는 대한천일은행에 많은 금액의 예금을 가지고 있었다. 예컨대, 영친왕의 모친인 순헌귀비(純獻貴妃)가 조선상업은행 20만 2,240여 원을 예치한 적이 있었다(『순종실록부록』 4년 12월 6일).

대한천일은행은 1910년대에 업세를 크게 확장하였다. 1911년 2월 행명을 조선상업은행으로 바꾸었고, 1912년에는 한성공동창고(주)를 합병하였다. 자본금이 57만 5,000원으로 늘어났고 창고업에도 진출하였다. 조선상업은행의 이 회사 합병은 한국근대 금융사·은행사에서 금융기관 합동의 효시였다. 한성공동창고는 화폐공황 수습을 위해 탁지부가 최대 주주로 참여하여 만든 창고금융회사인데, 1908년 6월을 전후하여 영업의 중심을 금융업에서 창고업으로 바꾸면서 경영 성적이 좋지 않았다. 그래서 일제는 1912년 4월 1일 이 회사를 조선상업은행에 합병시켰다. 이때에도 구황실(이왕가)에서는 여전히 조선상업은행의 주식 750주를 소유하여 1913년 상반기 이익배당금으로 1,062원 66전을 수령하였다(『순종실록부록』 6년 8월 2일).

1917년 2월 24일 조선상업은행은 자본금 57만 5,000원을 100만 원(2만 주)으로 증자하면서 그동안 한국인에게만 부여하였던 주주 자격을 일본인에게도 확대하였다. 이에 따라 1917년 상반기 말의 일본인 주주는 33명, 지주 수는 4,986주가 되었다. 총주주 대비 24.6%, 총주식 대비 24.9%였다. 그 후 이 비율은 꾸준히 늘었다. 그해 말에는 주주의 41.7%, 주식의 31.6%로 증가하였고, 1918년 말에는 주주의 54.0%, 주식의 48.6%로 확대하였다. 급기야 1919년 말에는 주주의 59.8%, 주식의 51.7%를 점유하여 일본인의 주식점유율이 과반을 차지했다. 일본인의 주식참여가 이처럼 빨리 확대한 것은 1917년 6월 말 이 은행의 최대주주가 조선총독이고, 지배인도 일본인이었기 때문이었다. 일본인들로서는 가장 안심하고 투자할 친근감 있는 은행이었던 셈이다. 당연히 일본인 고객의 출입도 크게 늘었다. 1910년대 조선상업은행의 경영 확대 과정에서 일본인이 소유권과 경영권을 장악한 것이다. 구황실(이왕가)은 1917년 3월 조선상업은행의 신주 755주를 추가로 인수하여 총 1,505주를 소유하고 있었다(『순종실록부록』 10년 3월 12일). 1930년 9월 2일 당시에는 1,010주를 소유하고 있었음이 확인된다.

일본인이 소유권과 경영권을 장악한 가운데, 1920년, 1930년대에 조선상업은행은 다수의 일본인 은행을 합병·매수하며 거대은행으로 성장하여 갔다. 1912년 한성공동창고(주)를 합병한 이래 무려 14개 은행을 합병한 자본금 992만 5,000원의 대은행이 되었다. 그중 12개는 일본인 은행이었다. 대부분의 한국인 은행이 한성은행으로 통합된 것에 반해 일본인 은행 대부분은 조선상업은행으로 대통합된 것이다. 일제는 이상의 일반은행 통폐합과 더불어 일반은행 지점의 강제 교환과 재배치도 추진하였다. 이에 따라 해방 당시 조선상업은행과 조흥은행의 지점은 지역적으로 상당한 편차를 보였다. 조선상업은행 지점은 북한 전역과 남한의 경남 지방에 편재하였고, 조흥은행 지점은 남한 전역에 편중된 양상을 보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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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승렬, 『제국과 상인: 서울·개성·인천 지역 자본가들과 한국 부르주아의 기원, 1896~1945』, 역사비평사, 2007.
  • 이승렬, 『한말·일제초기 대한천일은행 연구』, 연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3.
  • 이영훈 외, 『한국의 은행 100년사』, 산하, 2004.
  • 한백흥, 『구한말 민족은행 생성사 연구 1894-1910』, 시나리오알타, 19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