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도역(昌道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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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강원도 금성에 위치했던 역.

개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창도역(昌道驛)은 금성현(金城縣) 북쪽 31리(약 12.2㎞)에 있었다. 창도역은 1424년 통도역(通道驛)을 웅창역(熊昌驛)에 통합하면서 웅창역의 자리에 세워졌다. 웅창역은 고려시대 기성현(岐城縣)에 위치했던 웅양역(熊壤驛)에 해당되며, 웅양역은 고려 22개 역도 중 도원도(桃源道)에 소속되었다. 창도역의 전신인 웅양역은 동주(東州: 현 철원)에서 금성을 거쳐 교주(交州: 현 회양)를 연결하는 교통로상의 역(驛)이었으며, 웅양역의 후신인 창도역은 조선시대 한양(漢陽)에서 함경도를 연결하는 간선 교통로상의 주요한 요충지의 역으로 중시되었다.

내용 및 변천

조선시대 창도역은 한양에서 함경도를 연결하는 간선 교통로상에 위치하였으며, 남쪽의 한양 방면으로는 직목역과, 북쪽의 함흥 방면으로는 신안역과 연결되었다.

『세종실록』에 따르면, 창도역은 1424년(세종 6)에 금성의 통도역을 웅창역에 합쳐서 만들었다고 한다(『세종실록』 6년 3월 25일). 즉 창도역이라는 지명은 웅창역과 통도역의 명칭에서 따온 것이다. 그런데 『세종실록』「지리지」 금성현 조에서는 창도역 설치의 시기가 1425년(세종 7)이라고 서술되어 1년의 차이가 있고, 웅창역도 능창역(能昌驛)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는 『세종실록』「지리지」의 착오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세종실록』에서는 통도역을 웅창역에 합쳤다고 하였으므로, 통도역은 옛 웅창역의 위치에 두어진 것이다.

웅창역은 『고려사(高麗史)』「병지(兵志)」 참역(站驛) 조에 실린 22역도 525역 중 도원도(桃源道) 소속의 웅양역과 동일한 곳으로 파악된다. 웅양역이 어느 시기에 웅창역으로 개명된 것이다. 웅양역은 고려시대에 기성현 소속이었는데, 기성현은 조선시대에 들어서 금성현에 병합되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창도역이 경기강원도정역찰방(京畿江原道程驛察訪) 소속의 역으로 기록되었다. 하지만 1465년(세조 11)에 경기강원도정역찰방 관할하의 역들 중에 녹양역(綠楊驛) 등 경기도에 위치한 3역은 평구도(平丘道)로 이속되었고, 창도역을 포함하여 강원도에 위치했던 나머지 역들은 은계도(銀溪道)로 별도 설정되었다(『성종실록』 2년 4월 11일). 『경국대전(經國大典)』에는 강원도의 은계도(銀溪道) 소속의 역으로 편제되었으며, 『대전회통(大典會通)』에도 변경 없이 그대로 은계도 소속 역으로 유지되었다.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의하면, 창도역에는 대마(大馬) 3마리, 기마(騎馬) 2마리, 복마(卜馬) 11마리, 역리(驛吏) 158명, 역노(驛奴) 28명, 역비(驛婢) 81명이 배속되어 있었다고 한다.

1896년(고종 33) 1월에 대한제국 칙령 제9호 ‘각 역 찰방 및 역속 폐지에 관한 건’에 따라 전국의 역들이 폐지되면서 창도역도 폐지되었다.

창도역의 위치는 현재 북한의 행정 구역으로 강원도 김화군 창도리에 해당하며, 동쪽으로 인접한 창도군과는 별개이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여지도서(輿地圖書)』
  • 정요근, 「高麗·朝鮮初의 驛路網과 驛制 연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8.
  • 정요근, 「조선초기 驛路網의 전국적 재편」, 『조선시대사학보』46, 조선시대사학회, 2008.
  • 조선과학백과사전출판사·한국평화문제연구소 공편, 『조선향토대백과사전』, 평화문제연구소,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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