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산부(平山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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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도 중동부에 있으며 동쪽으로 신계·금천, 남쪽으로 연안, 서쪽으로 해주, 북쪽으로 봉산·서흥과 접하는 곳에 설치되어 주민들을 관할하던 관청이자 행정구역.

개설

평산부(平山府)는 삼국시대부터 있었으며, 고려시대 995년(고려 성종 14)에 방어사가 설치되었고, 조선시대 1415년(태종 15)에 도호부로 승격되어 조선말까지 유지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삼국시대에는 고구려 땅으로 다지홀(多知忽)이라 불리다가 대곡군(大谷郡)이 설치되었다. 통일신라시대 748년(신라 경덕왕 7)에 대곡성을 수축하였으며, 782년(신라 선덕왕 3)에 패강진(浿江鎭)으로 승격되어 군주(軍主)가 보임되었다. 고려시대에는 평주(平州)가 되었고, 995년에 방어사가 파견되었으며, 1018년(신라 현종 9) 이후 지주사(知州事)가 다스리는 읍이 되었다. 조선시대 1415년에 평산으로 이름이 정해졌고 도호부로 승격되었다(『태종실록』 15년 3월 25일).

조직 및 역할

수령은 종3품 도호부사가 보임되었다. 소속 군병은 세종 때까지는 시위군 290명, 영진군 144명, 선군 206명이 있었다. 의주에서 한양으로 통하는 의주대로는 황해도에서 북쪽의 황주에서 봉산, 서흥, 평산, 금천, 개성으로 이어졌다. 이괄의 난 때 반란군이 한양으로 진격할 때 이용하였고, 정묘·병자호란 때 후금군(청군)도 이 길을 이용하였다. 조선후기 황해도 지역 방어 체계를 정비하면서 이 통로의 방비를 위해 평산의 태백산성을 수축하였으며 부사가 후영장토포사(後營將討捕使)를 겸하게 하였다. 이후 관속으로는 좌수 1명, 별감 3명, 중군 1명, 별장 1명, 천총 1명, 파총 1명, 초관 5명, 교사 5명, 기고관 2명, 기패관 15명, 방영군관 50명, 토포군관 30명, 아전 41명, 지인 29명, 사령 41명, 관노 21명, 관비 26명이 있었다.

변천

1435년(세종 17)에 백성들의 송사와 환곡 운영의 편리를 위하여 읍치의 위치를 경내의 중앙에 가까운 기린역(麒麟驛) 부근으로 옮겼다(『세종실록』 17년 6월 14일). 1895년(고종 32)에 전국을 23부로 재편할 때 개성부 평산군이 되었으며, 이듬해에 13도제 시행으로 황해도 평산군으로 복구되었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황해도(黃海道) 평산도호부(平山都護府)
  • 『여지도서(輿地圖書)』황해도(黃海道) 평산(平山)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고승희, 「조선후기 황해도 內地 방어체계」, 『한국문화』38,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