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남현(海南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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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해남군과 영암군 일부에 설치된 조선시대 지방 관청이자 행정구역 명칭.

개설

고려 940년(고려 태조 23)에 해남현으로 고쳐서 영암군에 소속시켰다. 조선이 건국한 후 1409년(태조 9)에 해남현이 관할해 오던 2현 5소를 폐지하여 해남현에 편입하였다. 같은 해에 해남현과 진도현을 합하여 해진군(海珍郡)을 만들었다. 1437년(세종 19)에 해진군을 진도군과 해남현으로 다시 분리하여 각각 수령을 두었다. 1455년(세조 1)에 해남현이 전라도 흥양진(興陽鎭)의 우익을 맡았다. 1457년(세조 3)에는 해남현이 전라도 7진 가운데 하나인 장흥진에 속했다. 1479년(성종 10)에 여수에 수군절도사영(水軍節度使營)이 추가 설치되자 해남의 수영은 우수영으로 불렸다. 1867년(고종 4)에 해남을 비롯한 네 고을과 9진을 모두 진도진 관할로 변경하였다. 1895년(고종 32)에 8도제가 폐지되고 23부제가 시행되면서 해남현이 폐지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고려사』에는 940년에 침명현(浸溟縣)을 해남현으로 고쳐서 영암군에 소속시킨 것으로 되어 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1409년에 도관찰사(都觀察使)윤향(尹向)이 건의하여, 수령이 파견되지 않은 전라도의 현과 향·소·부곡은 거의 모두 본 고을에 합쳐졌다. 해남현이 관할해 오던 2현 5소가 폐지되어 해남현의 직촌(直村)이 되었다. 2현은 죽산현(竹山縣)과 진산현(珍山縣)이며, 5소는 웅산(熊山)·유산(杻山)·대상이(大上伊)·구량산(仇良山)·덕지(德池)이다. 같은 해에 해남현을 진도현과 합쳐 해진군으로 하였다. 1412년(태종 12)에 다시 해진군의 읍치(邑治)를 영암의 속현(屬縣)인 해남 옥산(玉山) 땅으로 옮겼다. 『증보문헌비고』에는 고려 때 폐지되어 영암에 소속시켰는데 1427년(세종 9)에 다시 현감(縣監)을 두었다고 되어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 1437년에는 해진군을 다시 해남군과 진도군으로 분리하였다(『세종실록』 19년 7월 3일).

조직 및 역할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해남현에 종6품 현감 1인과 종9품 훈도(訓導) 1인을 둔다고 되어 있다. 현감은 종6품 병마절제도위(兵馬節制都尉)를 겸하였다. 훈도는 5백 호 이상인 고을에는 모두 두기로 한 것에 따른 것이다(『세종실록』 12년 1월 21일). 해남현감 밑에 중앙 관제와 마찬가지로 이·호·예·병·형·공 6방을 두었다. 현감 아래 향청(鄕廳)의 향임(鄕任)으로 좌수(座首)와 별감(別監) 등을 두었다. 이들은 6방을 나누어 장악하여 현감의 지방 행정을 보좌하였다. 향임은 대부분 부세의 분배와 징수, 향풍의 교정, 향리의 감찰 등을 맡았다.

1447년(세종 29)에 연변(沿邊)의 수령을 무재(武才)가 있는 자로 임명하고, 긴요(緊要)한 정도에 따라 무관 임명 때도 차등을 두게 하였다. 중긴(中緊)으로 분류된 해남에는 비록 무과(武科)나 무재록(武才錄)에 오르지 못하였을지라도 이재(吏才)와 지략을 겸비한 자를 가려서 임명하기로 하였다(『세종실록』 29년 9월 4일). 1500년(연산군 6)에 해남 등 전라도 연해 고을의 수령을 무신으로 교체하기로 하였는데, 전라도에 흉년이 심하니 그 시행을 뒤로 미루고 우선 구휼에 힘쓰기로 하였다(『연산군일기』 6년 3월 8일) (『연산군일기』 6년 3월 9일). 1583년(선조 16)에도 해남 등의 문관 수령을 무신으로 바꾸어 임용하기로 한 적이 있었다(『선조실록』 16년 2월 20일). 이것은 해남을 비롯한 이들 지역이 군사상 중요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변천

1437년에 해진군을 진도군과 해남현으로 분리하였다. 각각 수령을 두어 원래대로 복구하였다(『세종실록』 19년 7월 3일).

1455년에 각 도의 내지(內地)에도 거진(巨鎭)을 설치하고 주변의 여러 고을을 중·좌·우익으로 나누어서 소속을 정하였다. 이때 해남을 전라도 흥양진의 우익으로 삼았다(『세조실록』 1년 9월 11일).

1457년에는 각 도의 중·좌·우익을 폐지하고 거진을 설치하였다. 이른바 진관(鎭管) 체제로 바뀌면서 전라도에는 7곳에 거진이 설치되었는데 해남현은 장흥진에 속했다(『세조실록』 3년 10월 20일).

진관 체제는 그 뒤로도 조금씩 변화를 거치면서 『경국대전』에 수록되었다. 해남현이 속한 장흥진관은 제주진관과 함께 충좌위의 전부(前部)에 편성되었다.

조선후기에는 해남현은 순천거진이 전라전영(全羅前營)으로 바뀌면서 전영(前營)에 소속되었다. 전영의 병수(兵數)는 마병(馬兵) 5초(哨), 속오(束伍) 46초, 표하군(標下軍) 188명, 당보군(塘報軍) 120명, 수솔군(隨率軍) 895명으로 되어 있다.

1479년(성종 10)에 여수에 수군절도사영(水軍節度使營)이 추가로 설치되었다. 이때부터 여수의 수영은 좌수영(左水營)으로, 해남의 수영은 우수영(右水營)으로 불렸다. 우수영의 수군절도사 즉 수사(水使)는 정3품관으로 유사시에는 인근 8개 고을의 군수와 현감을 지휘했다. 전라우도의 17개 수군 진영을 지휘하는 수군사령부가 해남에 있었다.

1867년에 진도방어영(珍島防禦營)의 진관을 변경하여 해남을 진도진 관할로 고쳤다(『고종실록』 4년 1월 2일).

1895년에 8도제가 폐지되고 23부제가 시행되면서 해남현이 폐지되었다. 1896년(고종 33)에 전국 23부를 다시 13도로 개정할 때 전라남도와 전라북도가 분리되었다. 전라남도는 수부(首府)를 광주에 두었으며, 해남군을 비롯한 32개 군과 제주목의 1목으로 편성되었다. 1906년(고종 43)에는 진도군의 월경지(越境地)였던 삼촌면(三寸面)이 해남군에 편입되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 『경국대전(經國大典)』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칙령(勅令)』
  • 『관보(官報)』
  • 『대동지지(大東地志)』
  • 『여지도서(輿地圖書)』
  • 『의안·칙령(議案·勅令)』
  • 김정호, 『지방 연혁 연구-전남을 중심으로』, 광주일보출판국, 1988.
  • 박종기, 『지배와 자율의 공간, 고려의 지방사회』, 푸른역사, 2002.
  • 손정묵, 『한국지방제도·정치사연구(상)-갑오경장~일제강점기-』, 일지사, 2001.
  • 이수건, 『조선시대 지방행정사』, 민음사, 1989.
  • 이존희, 『조선시대 지방행정제도 연구』, 일지사, 1990.
  • 『전라남도지』, 전라남도지편찬위원회, 1993.
  • 『전라북도지』, 전라북도, 1989.
  • 『해남군지』, 해남군지편찬위원회,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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