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주목(星州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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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지역을 중심으로 편성되었던 조선시대의 관청이자 행정구역.

개설

성주목(星州牧)은 신라의 본피현(本彼縣)에서 기원하며, 신라 경덕왕 때 신안현(新安縣)이 되어 성산군(星山郡)의 영현(領縣)으로 편성되었다. 후삼국시기에 이 지역 출신 이총언(李悤言)의 활약으로 인해 고려시대에 들어와서는 경산부(京山府)로 승격하였다. 995년(고려 성종 14)에는 대주도단련사(代州都團練使)가 설치되었으나 1012년(고려 현종 3)에 폐지되었고, 1018년(고려 현종 9)에 경산부로 환원되어 15곳의 속군현(屬郡縣)을 거느리는 대읍으로 성장하였다. 이후 몇 차례의 읍격 변동이 있다가 조선 건국 후인 1401년(태종 1)에 성주목으로 승격하였다. 성주목에는 목사(牧使)가 임명되었다. 초기에는 판관(判官)과 교수(敎授) 등이 함께 파견되었으나, 후기에는 두 직책이 모두 폐지되었다. 17세기에는 칠곡부(漆谷府)의 신설과 화원(花園) 지역의 대구 이속(移屬)으로 인하여 읍세가 약간 위축되었으나, 목으로서의 지위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1895년(고종 32)에 전국을 23부로 나눌 때 성주목은 성주군이 되어 대구부의 관할하에 있었으며, 1896년(고종 33)에 13도제가 실시되면서 경상북도 관할하에 놓이게 되었다. 성주군은 현재까지도 유지되고 있다. 조선시대 성주군의 읍치는 현재의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지역에 위치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성주목은 원래 신라의 본피현으로, 신라 경덕왕 때 신안현이 되었다가 후에 벽진군(碧珍郡)이 되었다. 고려시대에는 943년(고려 태조 23)에 경산부로 개명되었다. 981년(고려 경종 6)에 광평군(廣平郡)으로 강등되었다가 995년에 대주도단련사로 개칭되었다. 하지만 1012년에 단련사가 폐지되었으며, 1018년에는 다시 경산부가 되어 지경산부사(知京山府事)가 임명되었다. 1295년(고려 충렬왕 21)에 흥안도호부(興安都護府)로 개칭되었고, 1308년(고려 충렬왕 34)에 성주목이 되었다가 1310년(고려 충선왕 2)에 경산부로 환원되었다. 조선 건국 후인 1401년에는 임금의 태를 묻은 곳이라 하여 다시 성주목으로 승격되고 목사가 임명되었다.

조직 및 역할

성주목은 신라 경덕왕 때 성산군의 영현인 신안현으로 편제되고 신라 9주 중 강주(康州)의 관할하에 두었다. 당시 신안현에는 지방관으로 소수(少守) 혹은 현령(縣令)이 파견되었다. 이후 왕건의 후삼국 통일에 큰 공을 세운 이총언이 이 지역 출신이었기에 고려시대에 경산부로 승격되어 지경산부사가 중앙에서 파견되는 등 지역 중심지로 성장하였다. 『고려사(高麗史)』「지리지」에 의하면, 경산부는 1개의 군과 14개의 현을 속군현으로 거느리는 것으로 기록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성주목이 되어 목사가 파견되는 등 지역 중심지로서 경산부의 비중은 조선시대에도 그대로 유지되었다. 조선시대에 경상도에 목사가 임명된 고을은 성주와 상주(尙州), 진주(晉州) 단 세 곳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조선시대 성주의 중요성이 매우 높았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에 경산부에는 지부사(知府事)가 근무하는 외관청(外官廳)과 별도로 읍사(邑司)가 설치되어 토착의 향리(鄕吏)들이 자치적으로 지방 행정업무를 수행하였다. 조선시대에는 고려시대와 달리 향리의 권한과 지위는 약화되고 성주목사에게 모든 권한이 집중되었다.

고려시대 경산부의 후신인 조선시대 성주목의 영역은 기존의 경산부 영역 외에 고려시대의 가리현(加利縣)과 화원현, 팔거현의 영역이 통합되어 형성되었다. 하지만 옛 팔거현의 영역은 1640년(인조 18)에 칠곡부의 설치로 인해 성주로부터 분리되었고, 옛 화원현의 영역은 1684년(숙종 10)에 대구부로 이속되었다. 따라서 17세기 이후로는 성주목의 영역이 이전보다 축소되었다.

『경국대전(經國大典)』과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성주목에 정3품의 목사와 종5품의 판관, 종6품의 교수가 파견된 것으로 기록되었다. 18세기에 편찬된 지리서인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의하면 성주목에는 3품 혹은 4품의 문관(文官)이나 3품의 음관(蔭官)이 성주목사로 임명되며, 좌수(座首) 1명, 별감(別監) 3명, 군관(軍官) 70명, 인리(人吏) 85명, 지인(知印) 47명, 사령(使令) 35명, 군뢰(軍牢) 30명, 관노(官奴) 37명, 관비(官婢) 20명이 편성되었다. 즉 판관과 교수는 이때에 이미 폐지되었다. 19세기의 자료인 『대전회통(大典會通)』에도 성주에는 정3품의 목사가 임명된 것으로 기록되었으나, 판관과 교수는 폐지된 것으로 나와 있다.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성주의 호수가 1,479호, 인구는 5,807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여지도서』에는 1759년(영조 35)에 성주목의 호수가 11,970호, 인구는 56,828명으로, 그중 남자가 25,524명이고, 여자가 31,304명이라고 기재되어 있다. 18세기 후반에 편찬된 자료인 『호구총수(戶口總數)』에 의하면 성주에 40개의 방(坊)과 497개의 리가 기재되었으며, 호수는 11,952호, 인구는 54,365명으로, 남자는 26,862명, 여자는 27,503명이라고 한다. 1910년(순종 4)의 조사 내용인 『민적통계표(民籍統計表)』에 따르면 성주의 호수는 13,997호이고, 인구는 65,451명으로, 그중 남자가 34,487명, 여자가 30,964명이었다. 조선시대 성주목의 읍치와 관아는 현재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경산리 일대에 위치하였다.

변천

성주목은 1614년(광해군 6)에 신안현(新安縣)으로 강등되었다가(『광해군일기』 7년 9월 5일), 1623년(인조 1)에 다시 성주목으로 회복되었다. 1631년(인조 9)에는 성산현(星山縣)으로 강등되었다가(『인조실록』 9년 4월 8일), 1640년에 성주목으로 환원되었으며, 1644년(인조 22)에 다시 성산현이 되었다가 1653년(효종 4)에 성주목으로 복구되었다. 1736년(영조 12)에도 성산현으로 강등되었다가(『영조실록』 12년 10월 5일), 1745년(영조 21)에 성주목으로 회복되었다. 17세기 이래 영역적인 면에서 변화가 있어 1640년에는 옛 팔거 지역이 칠곡부의 신설로 분리되었고, 옛 화원 지역은 1684년에 대구부로 이속되었다. 1895년에 전국을 23부로 나눌 때 성주목은 성주군이 되어 대구부의 관할하에 편성되었다. 1896년에 13도제가 실시되면서 성주군은 경상북도 관할하의 2등군으로 편제되었다. 이후 성주군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참고문헌

  • 『삼국사기(三國史記)』
  • 『고려사(高麗史)』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志)』
  • 『대동지지(大東地志)』
  • 『민적통계표(民籍統計表)』
  • 『신구대조조선전도부군면리동명칭일람(新舊對照朝鮮全道府郡面里洞名稱一覽)』
  • 『여지도서(輿地圖書)』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