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행(朝鮮銀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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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년 한국은행으로 설립되었다가 1911년 조선은행으로 명칭이 바뀐 일제강점기 한국의 중앙은행.

개설

중앙은행이 존재하지 않았던 대한제국기에 일본의 일개 사립 은행인 제일은행이 실질적으로 중앙은행 역할을 했다. 1909년(순종 2)에 한국은행이 설립되면서 제일은행의 중앙은행 업무를 인계하였으며, 1911년 2월 28일 조선은행법에 따라 명칭이 조선은행으로 변경되었다. 창립 직후 조선은행이 중점을 둔 것은 해외 지점의 확대였다. 일제강점기 조선은행은 한국의 중앙은행 역할보다는 일본의 대륙 침략의 첨병 역할을 담당하며 국내보다 해외에서의 활동에 치중했다. 1919년에는 국내 지점 수의 2배가 넘는 해외 지점을 거느렸다. 확대일로에 있던 조선은행은 1920년 3월 전후 수출 부진에 따른 불황인 반동공황의 내습과 함께 대출 회수에 착수했으나 여의치 않았다. 1920년대 내내 업무 정리가 계속되었다. 1931년 만주사변이 발발하면서 조선은행의 영업이 호전되었고, 만주중앙은행의 설립을 주도하였다.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면서 조선은행은 영업 기반을 만주에서 중국으로 옮겼다. 전시기 조선은행은 제한외발행을 통해 통화량을 늘렸다. 해방 이후 극심한 인플레이션이 나타난 이유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일제강점기 한국의 중앙은행이었던 조선은행이 창립된 것은 1909년 11월이었다. 창립 당시에는 한국이 아직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기 전이었기 때문에 한국은행이라는 이름으로 창립되었다. 한국은행이 창립될 때까지 한국에서 중앙은행의 역할은 일본의 일개 사립 은행인 제일은행이 담당하고 있었다. 1911년 2월 28일 조선은행법에 따라서 조선은행으로 개칭되었다. 일본의 강점 이후 ‘한국’이란 용어의 사용이 금지되었기 때문이다. 한국의 중앙은행이라는 역할이 있었음에도 조선은행은 일반 은행의 주 업무인 예금과 어음할인 등의 대부업무를 겸했다. 따라서 한국의 여타 금융기관에 대한 영향력도 제한적이었다. 일제강점기 조선은행은 일본의 대륙 침략의 첨병 역할을 담당하며 국내보다 해외에서의 활동에 치중했다. 조선은행은 또한 구황실(이왕가)의 은행으로서의 역할도 했다. 구황실에 지불하는 세비와 세비에 잉여금이 발생할 때 조선은행에 예금했다(『순종실록부록』 7년 9월 3일).

조직 및 역할

창립 직후 조선은행이 가장 중점을 둔 것은 해외 지점의 확대였다. 조선은행은 일본과의 거래 확대에 따라 1910년 9월 오사카[大阪], 1913년 4월 도쿄[東京]에 지점을 개설한 뒤, 같은 해 7월 봉천(奉天), 8월 대련(大連), 9월 장춘(長春)과 사평가(四平街)에 각각 출장소와 파출소를 개설하였으며, 이어서 1918년까지 개원(開元), 하얼빈, 영구(營口), 용정촌(龍井村), 길림(吉林) 등에 지점과 출장소를 설치하였다. 그 외 하바롭스크, 청도(靑島), 상해(上海), 천진(天津) 등 만주를 중심으로 한 러시아와 중국 본토에까지 영업소를 개설하여, 1919년에는 국내 지점의 2배가 넘는 해외 지점을 거느리게 되었다. 조선은행이 해외 지점, 특히 대륙 진출에 적극적이었던 이유는 정화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변천

1910년대 중반 이후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전쟁 특수를 누리던 일본 경제는 1920년대에 들어와 극심한 불황에 시달렸다. 1910년대 대륙 진출을 통해 ‘방만하고 무경륜하게 경영하면서’, ‘장래 필연적으로 도래할 변동에 대처할 방책을 강구하지 않고 그때그때 추이에 따라 임해온’ 조선은행은 잇따른 공황으로 경영기반이 붕괴되면서 업무 정리에 분주한 1920년대를 보냈다. 1920년 3월 전후 반동공황이 내습하자 조선은행은 곧 대출 회수에 착수했다.

그러나 대출기업의 경영 악화로 대출은 대부분 고정화되어 쉽게 감소되지 않았다. 특히 조선은행은 만주의 중앙은행 역할을 해왔기 때문에 만주 지역의 각 은행과 기업에 대해 구제금융을 실시했는데, 이것마저 불량채권으로 변해 고정대출의 증대를 가중시켰다. 조선은행은 1922년 상반기 본격적인 고정대출 정리에 착수했다. 그러나 정리 작업도 결손액이 증가하여 실효를 거두지 못해 일본대장성은 1925년 봄에 ‘철저적(澈底的) 정리(整理)’를 지시했다. 이에 따라 조선은행은 1925년 8월 주주총회를 개최하여 감자를 의결하고, 7개 적자 점포를 해산했으며, 인원 감축도 단행하였다. 하지만 이 계획 또한 1927년의 금융공황으로 인해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이 시기 조선은행의 부진은 화폐발행고의 추이에도 반영되어, 1919년 165만 원이던 발행고는 1920년 말에 116만 원으로 떨어진 뒤 이후 정체했다. 그러나 제한외발행은 1921년부터 일상화하여 정화 유출에 따라 정화준비 발행고가 감소되는 가운데 제한외발행이 이루어지는 기현상이 빚어졌다. 일제는 조선은행을 구제하는 방편으로 발행세를 1926년 6%로 인하하였으며 1927년에는 다시 5%로 낮추었다.

1931년 만주사변의 발발은 오랜 불황의 돌파구였다. 물가가 오르고 경제는 활기를 띠게 되었으며, 경기회복에 따라 예금과 신규대출 모두 증가하기 시작했다. 담보물의 가격상승 등으로 정리도 급진적으로 촉진되었으며, 만주 침략에 편승하여 만주중앙은행의 설립을 주도하는 등 그동안 위축된 만주 지역의 영업도 활발하였다.

1930년대 초는 한국 경제의 전환기였다. 농업에 기반을 둔 한국 경제는 산미증식계획의 중단으로 큰 위험에 처했다. 이에 대해 조선총독부에서는 일본의 재벌을 끌어들여 이른바 ‘농공병진정책’을 통해 위기를 극복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총독부의 일본 자본 유치 노력과 만주사변 이후의 한국의 지리적 중요성이 증가되면서 일본 자본은 한국에 대거 진출했다. 조선은행 한국지점의 예금과 대부의 증가는 조선은행이 전반적인 업세 호전 때문만이 아니라 이러한 한국 경제의 양적 팽창에 힘입은 것이었다. 특히 조선은행은 공업대부의 비중을 1930년의 21%에서 1934년 15%, 1936년 28%로 점차 높여나가면서 식민지공업화에 재빨리 편승해나갔다.

1931년 일제의 만주 침략이 불황 극복의 계기가 되었다면, 1937년 중국 침략은 1910년대에 이어 제2의 전성기를 구가하는 발판이 되었다. 이 시기 조선은행의 영업기반은 만주에서 중국으로 옮겨지고, 내부적으로는 전시통제책의 영향으로 자금조달, 자금운영상에서 모두 큰 변화가 나타났다.

조선은행은 1937년 1월, 만주국 정부와 반반씩 출자해 만주흥업은행을 설립한 뒤 이 은행에 만주 지역의 20개 점포를 양도하고 만주로부터 철수하였다. 이로써 1920년대의 불황 극복의 발판이 되었던 주요 영업기반을 상실하였다. 그러나 조선은행은 곧 만주 지점을 대체할 새로운 영업기반을 회복하였다. 중일전쟁 발발 이후 조선은행권은 일본군의 중국 점령지에서 군용통화로 지정되었으며, 일제로부터 국고금 취급, 예금 및 대출 업무를 취급할 수 있는 파출소 개설을 허가받았다. 일본군의 점령지가 늘어남에 따라 지점 수는 중일전쟁 발발 전인 1937년 6월의 5개 지점에서 1941년 12월에는 25개 지점, 1944년에는 32개 지점으로 늘어났다.

중일전쟁의 발발은 조선은행의 한국 내 활동에도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일제는 ‘임시자금조정법’과 ‘수출입 등 임시조치법’을 통해 자금과 실물 양면에서의 군수 관련 사업을 지원하는 한편, ‘생산자금의 공급을 윤택하게 하고 공채 소화를 원활히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국비의 팽창에 따른 물가의 등귀를 억제’하기 위해 대대적인 강제저축운동을 벌여나갔다. 이를 위해 일제는 1938년 4월 총독부 내 ‘저축장려위원회’를 설치한 것을 시발로 전국의 모든 관공서, 학교, 회사, 행정기구의 말단조직까지 저축조합을 설치하였다. 1938년 12월에는 한국 내의 효율적인 금융통제를 위해 전 금융기관을 가입시킨 ‘조선금융단’을 발족시켰다. 조선은행은 조선금융단을 이끄는 우두머리로서 일제의 ‘국책’ 수행을 빈틈없이 이행해나갔다. 전시하 조선은행의 주요 임무는 방대한 국공채 소화와 전시 관련 산업에 대한 자금 대출로 요약된다. 그런데 이 양자는 모두 통화팽창의 요인이었다. 일제는 1937년 8월 중일전쟁 이후의 통화증발에 대비하기 위해 조선은행법을 개정하여 보증준비한도를 5,000만 원에서 1억 원으로 늘렸다. 이에 따라 1~8월까지 통산 180일이나 되는 제한외발행 일수가 9~12월에는 12일로 격감했다. 그러나 중국에서 조선은행권 발행고가 늘면서 1938년 제한외발행은 다시 72일로 늘었다. 그러자 일제는 1939년 5월 법률을 공포하여 보증준비발행 한도를 1억 600만 원으로 확장하였다.

그러나 1939년 9월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함께 통화팽창이 다시 가속화되자 1939년 5~12월까지 47일이던 제한외발행 일수가 1940년에는 350일로 늘어났다. 그러자 일제는 다시 1941년 3월 ‘조선은행법과 대만은행법의 임시특례에 관한 법률’을 공포하여 종래 발행준비와 보증준비로 나누어 준비하도록 한 규정을 철폐하고 대장대신이 매년 최고한도액만을 고시하는 ‘최고발행제한제’를 실시했다. 일제는 1941년에는 6억 3,000만 원, 1942년에는 7억 5,000만 원으로 고시하여 은행권 발행을 크게 늘렸다. 그 결과 조선은행이 그동안 내규로 지켜왔던 1/3 정화준비율은 붕괴되어 1942년에는 16%로 떨어졌으며, 1944년과 1945년에는 1% 이하로 떨어졌다. 이로써 조선은행권의 엔화 등가결제기구는 완전히 붕괴했다. 보증준비발행의 남발로 인해 1936년 1억 1,762만 원이던 조선은행권의 발행고는 1941년에 6억 2,000여 만 원, 1944년에는 26억 2,000여 만 원으로 7년간 무려 22배가 증가하여, 해방 이후 극심한 인플레이션 후유증을 남겼다.

참고문헌

  • 서광운, 『한국 금융 백년』, 창조사, 1972.
  • 윤석범 외, 『한국 근대금융사 연구』, 세경사, 1996.
  • 조선은행사연구회 편, 『조선은행사』, 동양경제신보사, 1987.
  • 多田井喜生, 『朝鮮銀行』, PHP硏究所,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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