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청(將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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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지방 관아·감영의 장교들이 근무하던 관서.

개설

장청은 지방 관아와 감영의 육방(六房) 관속들 중에서 병방(兵房) 소속의 장교들이 근무하는 사무실이다. 이들의 신분은 중인이며 행정 실무를 담당하였다. 대개는 그 직무가 세습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장청은 중앙 정부에서 외관직(外官職)과 그 기구를 정비하면서 성립되었다. 조선 건국 초기 수령권이 강화되고, 읍사(邑司) 조직이 설정되면서 장청도 편제되었다. 군정과 경찰 행정의 실무자로서 직무 수행을 위한 계획과 운영을 목적으로 하며, 수령을 보좌하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

조직 및 역할

장청에 소속된 행정 실무자들의 조직은 상위층은 향리, 하위층은 나졸로 구분된다. 장청은 작청(作廳)과 함께 향리 세력의 중심 기구였으며, 조선전기에는 유향소 즉 향청으로부터 검속을 받았으나, 조선후기에는 보다 독자적인 입지를 확보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즉 1825년(순조 25)의 『순조실록』 기사에 의하면, 백성들이 족징(族徵)·동징(洞徵) 등의 부당한 각종 세금으로 고통받고 있을 뿐만 아니라 향청(鄕廳)·작청·장청·노령청(奴令廳)·면임(面任)·이임(里任) 등이 서로 다투어 빼앗고, 혹 무단(武斷)과 토호(土豪)들이 따라서 벗겨 먹는다고 하였다(『순조실록』 25년 11월 19일).

변천

조선후기에는 강화된 수령권에 힘입어 향리 세력의 입지도 상승한 것으로 파악된다. 이 시기 장청 역시 수령권을 보좌하는 본연의 역할을 이행하면서도 양반이나 향청의 규제와 검속에서 보다 독자적인 입지를 확보해 간 것으로 보인다. 또한 장청의 순장(巡將) 등 고위직은 퇴역한 이후에도 읍사에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였던 것으로 파악된다. 따라서 고종 때에는 내무아문에서 각 도에 제반 규례를 훈시하면서, 제81조로 작청과 장청에서 계방(稧房)을 만들거나 예송(例送)하는 폐단, 그리고 차사(差使)의 예채(禮債)를 일절 엄금하라고 하였다(『고종실록』 32년 3월 10일).

참고문헌

  • 이규대, 『조선시기 향촌 사회 연구』, 신구문화사,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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