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성부(穩城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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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함경도 온성 지방을 관할하던 관청이자 행정구역.

개설

온성부(穩城府)는 1441년(세종 23) 설치되어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편에 따라 온성군(穩城郡)으로 변경되기까지 함경도 북부 지방의 행정과 군사상의 요지로 기능하였다. 육진(六鎭)의 개척 과정에서 설치되어 두만강을 사이에 둔 동북 지역 국경선을 확정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본래 고구려의 옛 땅으로, 당(唐)나라가 한때 지배했다.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 때에는 동경용원부(東京龍原府) 지역이었다.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는 건국 당시 이 지역까지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였다. 이 지역은 발해가 거란에 멸망한 뒤 오랫동안 거란과 여진(女眞) 등 이민족의 지배 아래 있었다. 여진은 이 지역을 다온평(多溫平)이라고 불렀다. 고려말 공민왕 때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를 혁파하고 북진하여 두만강 최하류 지방까지 확보한 뒤 동북면(東北面)이라고 불렀다.

조선이 건국한 뒤 1398년(태조 7)에 공주(孔州)의 옛터에 경원부(慶源府)를 설치하며 육진의 개척이 시작되었다. 1410년(태조 10) 여진의 침입에 따라 경원부를 경성으로 후퇴시키면서 그 이북의 땅이 25년 동안 비게 되었다. 세종 때 김종서(金宗瑞)의 육진 개척 사업이 궤도에 올라, 1440년(세종 22) 다온평 지역에 처음으로 군(郡)을 설치하면서 지금의 이름인 온성(穩城)으로 고치고, 경원(慶源) 및 길주(吉州)의 남쪽과 안변(安邊)의 북쪽에 있는 여러 고을 민호를 옮겨 이곳에 채웠다(『세종실록』 22년 11월 26일). 1441년에 도호부(都護府)로 승격시키고 판관(判官)을 두었으며 토관(土官)을 설치하였다(『세종실록』 23년 1월 29일) (『세종실록』 23년 5월 6일) (『세종실록』 23년 5월 23일) (『세종실록』 23년 윤11월 19일).

조직 및 역할

도호부사 즉 부사(府使)는 조선전기 『경국대전(經國大典)』에는 종3품으로 규정되었지만, 조선후기 『여지도서(輿地圖書)』에는 문관(文官)이나 무관(武官) 정3품으로 되어 있다. 임기는 30개월이었다. 종5품 판관이 있었지만 『속대전(續大典)』에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회령(會寧)의 예에 따라 1659년(효종 10)에 없앤 것으로 보인다. 『여지도서』에 따르면 부사에 직속된 이속(吏屬)으로 좌수(座首) 1명, 별감(別監) 3명, 군관(軍官) 10명, 아전(衙前) 99명, 지인(知印) 25명, 사령(使令) 13명, 군뢰(軍牢) 30명, 관노(官奴) 87명, 관비(官婢) 100명이 있었다.

남쪽 지방과 달리 함경도와 평안도에는 토관으로 몇 개의 행정 기구가 설치되었다. 온성의 토관직으로는 도할사(都轄司)에 종6품의 도할(都轄)과 정7품의 전사(典事) 각 1원을 두었다. 전례서(典禮署)에 종6품의 감부(勘簿), 종8품의 급사(給事), 종9품의 섭사(攝事) 각 1원을 두었으며, 융기서(戎器署)·사창서(司倉署)에 종7품의 장사(掌事)와 종9품의 섭사 각 1원을 두었다. 또 전주국(典酒局)에 급사·섭사 각 1원을 두었으며, 사옥국(司獄局)에 섭사 1원을 두었다. 이상은 문관으로 관찰사가 본도 출신 중에 후보자를 추천하였다.

이 밖에 무관 토관직도 설치되었다. 유원위(柔遠衛)에 정6품의 여과(勵果), 종6품의 부여과(副勵果), 정7품의 여정(勵正), 종7품의 부여정(副勵正) 각 1원, 정8품의 여맹(勵猛) 2원, 종8품의 부여맹(副勵猛) 3원, 정9품의 여용(勵勇) 3원, 종9품의 부여용(副勵勇) 5원을 두었다. 무관 토관직은 절도사가 본도 출신 중에 후보자를 추천하였다. 토관이 경관(京官)으로 임명될 때에는 문반과 무반 모두 1품계를 강등하여 적용하였다. 토관은 퇴관(退官)할 차례가 되었어도 나이 60세가 되어서야 퇴직하였다.

『여지도서』에 따르면 함경도 다른 지역의 경우는 대부분 사(社)를 행정 단위로 하는데, 온성은 남부 지역의 다른 도(道)와 같이 리(里)를 행정 단위로 하는 점이 특이하다. 온성의 관할 행정구역으로는 관아가 소재한 성내(城內)를 위시하여 포항리(浦項里), 주원리(周原里), 와동리(瓦洞里), 영달동리(永達洞里), 당동리(堂洞里), 즙포리(汁浦里), 어후리(於厚里), 장충동리(長忠洞里), 덕천리(德川里), 덕산리(德山里), 덕명리(德明里), 안화리(安和里), 황척파리(黃拓坡里), 미전리(美錢里), 유원리(柔遠里), 영달리(永達里)의 17리가 있었다.

변천

1442년(세종 24)에 진(鎭)을 설치하고, 절제사(節制使)를 겸하게 하였다(『세종실록』 24년 4월 27일). 1630년(인조 8)에 유원(柔遠)의 토병(土兵) 양사복(梁士福)과 귀양 온 사람인 양계홍(梁繼洪)·정운백(鄭雲白)·한회(韓回) 등이 반역을 꾀하다가 처형됨에 따라 현(縣)으로 강등되었다가, 1633년(인조 11)에 다시 부(府)로 승격되었다. 1895년(고종 32) 지방관제가 대구역주의인 8도제에서 소구역주의인 23부제로 바뀌면서 경성부(鏡城府) 소속의 종성군(鍾城郡)으로 바뀌었다(『고종실록』 32년 5월 26일).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속대전(續大典)』
  • 『대전통편(大典通編)』
  • 『대전회통(大典會通)』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여지도서(輿地圖書)』
  • 손정목, 『한국지방제도·자치사연구(상)』, 일지사, 1992.
  • 윤정애, 「한말 지방제도 개혁의 연구」, 『역사학보』105, 역사학회, 19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