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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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1년 근대적 내정 사무를 관장하기 위해 설치한 기구.

개설

통리기무아문은 근대적 문물제도를 수용하고 외국과의 개국 통상을 위하여 진일보한 자주적 의식에서 설립된 기구이다. 비록 청나라의 총리각국사무아문(總理各國事務衙門)을 모델로 하여 명칭이 유사하나 직제와 기능, 하부 조직은 군국아문에 준한 것이기 때문에 주로 대외 업무를 주관하던 청나라의 업무와는 동일할 수 없었다. 통리기무아문은 후일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통리군국사무아문(統理軍國事務衙門)으로 분리되는데 이때 전자는 청나라의 총리각국사무아문과 유사한 점이 많았다.

설립 경위 및 목적

흥선대원군이 물러난 1873년 이후 유명무실해진 삼군부(三軍府)를 폐지하고 1881년 1월 19일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하였다. 통리기무아문은 정1품 아문으로 의정부와 동등한 권한을 가지고 군국기무(軍國機務)를 총괄하는 기능을 하였다. 여기서 군국기무란 “무릇 사대, 교린, 군무, 변정(邊情) 등에 관계되는 사무를 새로이 설치되는 아문으로 하여금 전적으로 담당하게 하라.” 했던 것처럼 사대교린에 관한 외교 관계 사무와 군무 변정에 관한 군사 관계 사무를 의미한다.

통리기무아문은 외국과의 교섭 외에, 과거 비변사와 삼군부가 그러했던 것처럼 주요한 내정 문제도 처리하였고 의정부와 동등한 위상으로 중앙과 지방의 관료 조직으로부터 사안을 보고받았다. 외국과의 교섭 중 가장 먼저 추진한 것은 신식 무기 제조 기술 학습을 위해 중국에 영선사(領選使)를 파견하는 것이었다. 근대적 제반 문물 수입을 위해 일본에는 조사시찰단(朝士視察團) 파견을 추진하였다. 또한 아문의 당상이 전권대관 또는 부관이 되어 미국, 영국, 독일과 수호통상조약 체결에 참여하였다. 통리기무아문에서는 이전에 중국·일본과 교환한 문서를 집대성한 『동문휘고(同文彙考)』를 1883년 간행하였다. 통리기무아문은 군국기무와 관계된 나라의 내정과 기밀을 취급하여 궁중(宮中)과 각(各) 사(司), 팔도사도(八道四都)의 크고 작은 사항을 문서로 보고받았다. 특히 일본공사하나부사 요시타다[花房義質]를 통해 호리모토 레이조[堀本禮造]를 군사 교관으로 초빙하여 최초의 근대적 신식 군대인 별기군(別技軍, [倭別技])을 설치하였다.

조직 및 역할

설립 당시 통리기무아문은 왕에게 바친 「신설아문절목(新設衙門節目)」에 따라 12사의 조직으로 구성되고 직무는 외교 관계 사무와 군사 관계 사무로 구분되었다. 12사는 사대문서, 중국 사신의 접대, 군무·변정사신(邊政使臣)의 차송 업무를 맡은 사대사(事大司), 교린문서, 왕래 사신의 영송의 업무를 맡은 교린사(交隣司), 중외 군대의 통솔을 맡은 군무사(軍務司), 변무(邊務) 및 이웃 나라 동정의 정탐을 맡은 변정사(邊政司), 중국 및 인국과의 통상 관계를 맡은 통상사(通商司), 병기 제조를 맡은 군물사(軍物司), 각종 기계 제조를 맡은 기계사(機械司), 각종 선함의 제조와 관리를 맡은 선함사(船艦司), 연안 각 포구에 출입하는 선박의 순검을 맡은 기연사(譏沿司), 각국의 언어와 문자의 번역을 맡은 어학사(語學司), 각 관청 직원의 신분 및 인사 관리를 맡은 전선사(典選司), 각 관청에서 사용하는 물품의 수급 조절을 맡은 이용사(理用司)였다(『고종실록』 17년 12월 21일).

통리기무아문은 대신 중에서 총리를 임명하여 절제(節制) 시무(視務)케 하여 의정부와 같게 하였고, 전·현직 대신이 통리기무아문의 도상(都相)을 겸임케 하였다. 당상은 인원수를 불문하고 경리통리기무아문에 임명하고 낭청(郎廳)은 정해진 수 없이 선택하되 참상(參上)은 주사로 하고, 참하(參下)는 부주사로 하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통리기무아문의 총리대신에는 영의정이최응(李最應)을, 통리기무아문 당상으로는 경기감사김보현(金輔鉉), 지중추부사민겸호(閔謙鎬), 상호군김병덕(金秉德), 예조 참판김홍집(金弘集) 등 10명을 임명하여 새로운 중추적 정부 기관을 발족하였다. 또한 중요한 직책 외에는 능력에 따라 등용하라는 왕의 특별 명령에 따라 수문장이제마(李濟馬)와 개화 인사인 별선군관이동인(李東仁)이 파격적으로 참모관에 임명되었다.

변천

통리기무아문은 정치제도를 현실 상황에 맞게 재편할 필요성에 따라 1881년 11월 종래의 12사에서 동문사(同文司), 군무사, 통상사, 감공사(監工司), 전선사, 이용사, 율예사(律例司)의 7사로 개편되었다(『고종실록』 18년 11월 9일).

그러나 통리기무아문은 근대적인 기구로 개편된 지 얼마 되지 않아 개화 정책에 반발하고 있던 국내 보수 세력이 일으킨 임오군란으로 1년 반 만인 1882년 7월 24일 폐지되었다. 통리기무아문이 폐지된 후 삼군부가 부활하였으나 흥선대원군이 재집권하자마자 중국으로 납치되어, 8월 궁궐 내에 설치된 기무처(機務處)가 일시적으로 통리기무아문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러던 중 1883년 1월 정부는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과 통리군국사무아문으로 직무를 이원화하여 전자는 대외 문제를 후자는 내정을 전담케 하였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권석봉, 「영선사행(領選使行)에 대한 일고찰: 군계학(軍械學) 조사를 중심으로」, 『역사학보』17·18, 1962.
  • 김수암, 「한국의 근대 외교제도 연구: 외교관서와 상주사절을 중심으로」,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0.
  • 이광린, 「통리기무아문의 조직과 기능」, 『이화사학연구』17·18, 1988.
  • 전미란,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에 관한 연구」, 『이대사원』24·25, 1989.
  • 전해종, 「통리기무아문 설치의 경위에 대하여」, 『역사학보』17·18, 19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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