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안현(禮安縣)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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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예안현 |
한글표제 | 예안현 |
한자표제 | 禮安縣 |
관련어 | 매곡(買谷), 선곡(善谷), 선성(宣城) |
분야 | 정치/행정/관청 |
유형 | 집단·기구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신라~조선 |
왕대 | 신라~조선 |
집필자 | 정요근 |
폐지 시기 | 1914년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예안현(禮安縣)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고종실록』 32년 5월 26일 |
현재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예안면 지역을 중심으로 편성되었던 조선시대의 관청이자 행정구역.
개설
예안현(禮安縣)은 삼국시대의 매곡현(買谷縣)에서 기원한다. 신라 경덕왕 때 선곡현(善谷縣)으로 개명하고 신라 9주 중 삭주(朔州)에 소속된 내령군(奈靈郡: 현 경상북도 영주시 중심부 일원)의 영현(領縣)이 되었다. 고려시대에는 예안군(禮安郡)으로서 안동부(安東府)에 속했다가, 이후 예안현이 되었다. 1390년(고려 공양왕 2)에 처음으로 감무(監務)가 파견되어 안동으로부터 벗어났고, 조선시대 1413년(태종 13)에 예안감무를 예안현감(禮安縣監)으로 개칭하였다. 조선시대에 예안현감은 종6품의 관직이었다. 예안현은 1895년(고종 32)에 예안군으로 승격하였으나, 1914년에 안동군에 합병되어 폐지되었다. 조선시대에 예안현의 관아는 현재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동부리, 서부리 일원에 위치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고려사(高麗史)』 「지리지」에 의하면 예안현은 고구려의 매곡현에서 기원한다. 하지만 삼국시대에는 대체로 신라의 판도 내에 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신라 경덕왕 때 선곡현으로 개명하고 내령군의 영현이 되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지리지」에는 선곡현의 위치가 어디인지 알 수 없다고 하였으나, 『고려사』「지리지」에는 고려 예안군의 전신이었다고 기록되었다. 고려시대에 들어와 예안군으로 개명하였고, 1018년(고려 현종 9)에 안동부의 속군(屬郡)이 되었으며, 이후 예안현이 된 것으로 보인다. 1376년(고려 우왕 2)에 우왕의 태를 묻은 곳이라 하여 예안군으로 승격시켰다가 얼마 후에 다시 주(州)로 올렸다고 하는데, 주의 명칭은 알려져 있지 않다. 1388년(고려 우왕 14)에 위화도회군으로 우왕이 실각한 후 예안현으로 환원된 것으로 여겨진다. 1390년(고려 공양왕 2)에 처음으로 감무가 파견되었고 의인현(宜仁縣: 현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의촌리 일원)을 소속시켰다. 조선시대 1413년에 전국의 감무를 현감으로 개칭할 때 예안감무도 예안현감이 되었다.
조직 및 역할
신라시대에 선곡현은 내령군의 영현으로 소수(少守) 혹은 현령(縣令)이 파견되었다. 고려시대에 예안현은 안동부에 소속된 속군이었다. 속군인 예안군에는 중앙에서 별도의 지방관을 파견하지 않았으며, 안동부에 파견된 지방관이 예안군을 관할하였다. 대신 예안에는 별도로 읍사(邑司)가 설치되어 토착의 향리(鄕吏)들이 자치적으로 지방 행정업무를 수행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서 향리의 권한과 지위는 약화되고 예안현의 현감에게 모든 권한이 집중되었다.
『경국대전(經國大典)』과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예안현에는 종6품의 현감과 종9품의 훈도(訓導)가 파견되었다. 18세기의 지리서인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의하면 예안에는 6품의 문관(文官) 또는 음관(蔭官)이 현감으로 임명되며, 좌수(座首) 1명, 별감(別監) 1명, 군관(軍官) 15명, 인리(人吏) 46명, 지인(知印) 18명, 사령(使令) 15명, 관노(官奴) 34명, 관비(官婢) 14명이 편성되었다. 『대전회통(大典會通)』에도 종6품의 현감이 임명된다는 내용이 있다.
변천
1413년에 예안감무가 예안현감으로 개칭된 이후, 조선시대 내내 예안현에 관한 연혁에서 거의 변동이 없다. 1895년에 전국을 23부로 나누었을 때 예안군으로 변동되어 안동부의 관할에 속했다(『고종실록』 32년 5월 26일). 1896년(고종 33)에 13도제가 실시되면서 예안군은 경상북도 관할의 4등군으로 편제되었다. 하지만 1914년에 일제가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안동군에 편입되어 폐지되었다. 조선시대에 예안현의 관아는 현재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동부리·서부리 일원에 있었으나, 안동댐 건설로 인하여 낙동강에 수몰되었다.
참고문헌
- 『삼국사기(三國史記)』
- 『고려사(高麗史)』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志)』
- 『대동지지(大東地志)』
- 『신구대조조선전도부군면리동명칭일람(新舊對照朝鮮全道府郡面里洞名稱一覽)』
- 『여지도서(輿地圖書)』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