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소도감(園所都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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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왕의 친부모나 황태자비의 사후 장지를 마련하고 시신을 매장하기 위하여 설치한 임시 관청.

개설

조선시대에 왕이나 왕비가 승하하면 산릉도감을 설치하여 왕릉을, 왕세자와 왕세자빈이 세상을 떠나면 묘소도감을 설치하여 묘소를, 왕의 친어머니나 할머니가 승하하면 원소도감을 설치하여 원소(園所)를 조성하였다. 이렇게 왕실의 계층에 따라 능·원·묘를 달리 조성하는 제도는 1753년(영조 29) 영조가 친어머니인 숙빈최씨(淑嬪崔氏)를 모시는 별묘(別廟)를 육상궁(毓祥宮)으로, 묘소는 소령원(昭寧園)으로 격상시키면서 시작되었다.

이후 정조는 이를 따라 즉위하자마자 친아버지인 사도세자를 별묘인 수은묘(垂恩廟)에서 경모궁(景慕宮)으로, 수은묘(垂恩墓)에서 영우원(永祐園)으로 승격하였다. 1789년(정조 13)에는 영우원을 수원부화성으로 옮기면서 이전의 영우원을 옮기는 천봉도감(遷奉都監)을 설치하였다. 동시에 영우원을 현륭원(顯隆園)으로 개칭하면서 새로 원소를 조성하는 원소도감을 최초로 설치하여 운영하였다.

이처럼 원소도감은 왕의 친부모를 위해 설치·운영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대한제국 때인 1904년(고종 41) 황태자비 순명비가 훙서하자 궁원제(宮園制)에 의거하여 원소도감을 설치하고 유강원(裕康園)을 조성하기도 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역대 왕이나 왕비만이 사후 종묘와 왕릉에서 향사(享祀)를 받았기 때문에, 서자 출신이거나 다른 계통 출신의 왕들은 자신의 친부모가 종묘에서 향사를 받을 수 없음을 안타깝게 여겼다. 이에 1753년 영조는 궁원제를 창안하여 자신의 친어머니인 숙빈최씨를 모시는 별묘(別廟) 육상묘(毓祥廟)를 육상궁(毓祥宮)으로, 묘소인 소령묘(昭寧墓)를 원소인 소령원(昭寧園)으로 격상시켰다. 영조는 궁원제를 정착시키고자 궁원의 제도, 격식, 의례 절차 등을 정리하여 『궁원식례(宮園式例)』를 펴냈다. 이후 1755년에는 선조의 후궁이며 추존된 원종의 생모인 인빈김씨(仁嬪金氏)의 별묘 송현궁(松峴宮)저경궁(儲慶宮)으로, 묘는 순강원(順康園)으로 봉원하였다.

정조는 이를 답습하여 1776년 즉위하자마자 친아버지인 사도세자를 별묘인 수은묘에서 경모궁으로, 수은묘에서 영우원으로 개칭하였다. 1780년에는 경모궁의 의례와 제도, 절차 등을 정리한 『궁원의(宮園儀)』를 간행하였고, 1784년에는 『경모궁의궤(景慕宮儀軌)』를 편찬하여 제도화였다. 이후 1789년 영우원을 수원부의 화성으로 옮길 때 영우원을 옮기기 위해 천봉도감을 설치하였다. 또한 영우원을 현륭원으로 개칭하여 새로 조성하기 위해 원소도감을 설치하여 운영하였다.

이후 원소도감은 1815년(순조 15) 정조의 친어머니인 혜빈홍씨의 사후 현륭원을 조성하고자 설치하였다. 그 외 원소도감은 1823년 순조의 친어머니 수빈박씨의 사후 휘경원을 조성하기 위해, 1855년과 1863년 휘경원을 옮겨 조성하기 위해 설치하였다.

이처럼 영·정조 시대를 거치면서 왕의 친부모가 사망하면 다음의 <표 1>과 같이 별궁과 원소로 개칭하고 궁원(宮園)을 조성하여 향사를 받게 하거나 왕릉에 버금가게 만들었다. 반면 왕의 친부모가 아닌 경우에는 궁묘(宮墓) 혹은 묘원(廟園)으로 짝을 이뤄 격을 달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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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1870년에는 세자나 세자빈의 묘소를 왕자의 묘소와 구분하기 위하여 격상시켜 원소로 부르게 되면서 능·원·묘의 제도가 정착되었다. 이후 대한제국 시대에 들어 1904년 순명황태자비가 승하하자 궁원제에 의해 왕비의 국상에 준하는 원소도감을 설치하여 유강원을 조성하였다. 또 1911년 고종의 후궁이자 영왕의 사친인 순헌귀비 엄씨의 사후 원소도감을 설치하여 영휘원을 조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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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 및 역할

원소도감의 총책임자는 산릉도감과 마찬가지로 총호사(總護師)이며, 영의정이나 좌의정 등 재상이 맡아서 예장도감과 빈궁혼궁도감을 총괄하였다. 원소도감의 책임자는 제조(提調)로서 2~3명이었고 판서가 했다. 도감을 실질적으로 운영하는 관원은 도청(都廳) 1~3명을 비롯하여 각 소(所) 낭청(郎廳) 1~2명씩으로 총 6~11명이었다. 각 소 감조관(監造官)은 3명이었고 별공작 분차관은 선공감 감역 1명이, 분장흥고 분차관은 장흥고 직장 1명이, 번와소 분차관은 와서별제 1명이 맡았다. 원소도감에는 장지를 선정하는 상지관 5명, 질병을 고쳐 주는 의원(醫員)도 있었다. 그리고 실질적인 업무는 계사, 녹사, 서사, 서리, 서원, 고직, 사령, 군사 등 40명이 맡아 처리하였다.

조선시대 원소도감의 세부 조직은 산릉도감이나 묘소도감과 거의 비슷하다. 전체 업무를 총괄하는 도청이 있고, 하부 제작처로 삼물소, 조성소, 대부석소, 소부석소, 수석소, 보토소, 노야소, 별공작, 분장흥고, 번와소 등이 있었다. 각 소와 분소에는 각색 장인들이 소속되어 원소를 조성하는 데 필요한 봉분(封墳)이나 건물, 석물 등을 제작하였다.

대한제국 시대의 원소도감은 조선시대의 조직 체계를 거의 그대로 유지하였다. 그러나 1894년 갑오개혁 때 정부 조직이 개편되면서 황실의 업무는 1895년에 설치된 궁내부 산하 장례원에서 주도하였으며 관제의 명칭도 바뀌었다. 1904년 순명황태자비의 유강원 원소도감의 경우 하부 제작처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단, 1882년 와서가 해체되었기 때문에 번와소만 설치되지 않았다. 규모는 조선시대 왕비의 국상 때 설치된 산릉도감의 수준으로 격상되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조직이 변하여 1911년 설치된 영휘원 원소도감의 조직은 이전 시기와 달랐다. 총 23개 항목으로 열거하고 있어 큰 차이를 보였다.

참고문헌

  • 서울대학교 규장각, 『규장각 소장 의궤 해제집』2, 서울대학교 규장각, 2004.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국학진흥연구사업추진위원회 편, 『장서각 소장 의궤 해제』,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002.
  • 장경희, 「순종비 순명효황후의 생애와 유릉 연구」, 『한국인물사연구』12, 2009.
  • 장경희, 「조선후기 산릉도감의 장인 연구: 왕릉 정자각과 석의물의 제작과정을 중심으로」, 『역사민속학』25, 2007.
  • 장경희, 「조선후기 흉례 ‘도감’의 장인 연구」, 『미술사논단』8, 1999.
  • 정경희, 「조선후기 궁원제의 성립과 변천」, 『서울학연구』23,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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