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양군(溫陽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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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아산시 온양에 설치된 조선시대 지방 관청이자 행정구역 명칭.

개설

온양군(溫陽郡)은 조선시대 충청도 청주목에 속한 군이다. 본래 이름은 탕정군(湯井郡), 온수군(溫水郡)이었다. 1441년(세종 23)에 세종의 행차를 기념해서 온양군으로 고쳤다. 역대 국왕들이 행차한 온천이 있어 유명해졌다. 15세기에 인구는 343호에 1,516명이었다. 군정은 시위군(侍衛軍) 21명, 선군(船軍) 96명이었다. 토지는 3,853결인데, 이 가운데 논이 1/3 정도였다. 1914년에 아산군에 통합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삼국시대에는 백제의 탕정군이었다. 통일신라시대 671년(신라 문무왕 10)에 주(州)로 승격하여 총관(摠管)을 두었다. 681년(신라 신문왕 1)에 9주 5소경 제도로 개혁하면서 주를 폐지하고 군으로 삼았다. 고려시대에 온수군으로 고쳤고, 1018년(고려 현종 9)에 천안부(天安府)의 임내로 삼았다. 1172년(고려 명종 2)에 감무를 두었다. 조선시대에는 1414년(태종 14)에 온수현과 신창현(新昌縣)을 합치고 이름을 온창현으로 고쳤다. 1416년(태종 16)에 다시 분리하고 현감(縣監)을 두었다. 1441년(세종 23)에 세종이 온천에 거둥했다는 이유로 온수군을 승격시켜 온양군으로 삼고 관노비를 증설하였다.

온양온천은 역대 국왕들과 왕족, 고관, 명신들의 요양지였다. 세종이 거둥한 이후로 온양온천에 왕의 행궁을 설치하였다. 정전 16칸, 외정전 12칸, 탕실 12칸 규모였다. 그러나 온천으로 인해서 온양의 부역으로 주민들이 고통받았는데, 충청도에서 온양의 부역 부담이 제일 가혹하다는 평을 받기도 하였다(『현종실록』 6년 5월 11일).

조직 및 역할

수령은 종4품 군수이다. 홍주진관에 속하였다. 좌수 1명, 별감 2명, 아전 30명, 지인 13명, 관노 11명, 관비 12명, 사령 16명이 속해 있었다.

변천

조선후기에는 행정단위에 변화가 없었다. 18세기에 가호는 2,816호, 인구는 남자 6,129명, 여자 8,774명이었다. 토지는 밭 2,048결, 논 1,342결이었다. 1901년(고종 38)의 『온양군양안(溫陽郡量案)』에서 온양은 9개 면으로 구성되었고, 호구는 3,387호, 토지는 2,138결이었다. 1913년에 온양, 아산, 신창 3개 군을 통합하였다. 1914년에 온양은 아산으로 완전히 통합되어 아산군 온양읍이 되었다.

참고문헌

  • 『대전회통(大典會通)』
  • 『대동지지(大東地志)』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여지도서(輿地圖書)』
  • 『온양군양안(溫陽郡量案)』
  • 『온양군읍지(溫陽郡邑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