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흥부(瑞興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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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도 동북부에 있으며 북쪽으로 평안도 중화, 동쪽으로 황해도 수안·신계, 남쪽으로 평산, 서쪽으로 황주·봉산과 접경하는 지역에 설치되어 주민들을 관할하던 관청이자 행정구역.

개설

서흥부(瑞興府)는 고려시대 995년(고려 성종 14)에 방어사가 설치되었고, 1270년(고려 원종 11)에 현이 되었으며, 조선이 개창한 후인 1424년(세종 6)에 도호부로 승격되어 조선말까지 유지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삼국시대에는 고구려 땅이었으며 우차탄홀(于次呑忽)이라 불리다가 성을 쌓은 후 오곡성(五谷城)이라 하였다. 통일신라시대 748년(신라 경덕왕 7)에 오관군(五關郡)이 설치되었다. 고려초에는 동주(洞州)라 하였고, 995년(고려 성종 14)에 방어사를 두었으나 1012년(고려 현종 3)에 폐지되고 평주의 속현이 되었다. 원종의 태를 봉안한 곳이라 하여 1270년(고려 원종 11)에 서흥현으로 승격되었으며, 1391년(고려 공양왕 3)에 경기우도 소속이 되었다. 조선 건국 후 1394년(태조 3)에 한양으로 천도하면서 경기도의 관할이 조정되어 서흥은 서해도 소속이 되었다. 1415년(태종 15)에 군(郡)이 되었으며, 이곳 출신 명나라 환관 윤봉(尹鳳)이 사신으로 와서 읍호를 올려 줄 것을 청하여 1424년(세종 6)에 도호부로 승격하였다.

조직 및 역할

현감은 음관(蔭官) 6품직이었다. 좌수 1명, 별감 2명, 도감 6명, 군관 25명, 아전 23명, 지인 15명, 사령 30명, 관노 36명, 관비 26명이 있었다.

의주에서 한양으로 이어지는 직로에 있는 요충지였으므로 경내의 대현산성(大峴山城)에는 별장(別將) 1명이 배치되었고, 부장(部將) 133명과 수첩군관(守堞軍官) 50명, 모군(募軍) 50명이 소속되었다.

변천

1612년(광해군 4)에 역적 민탁(閔卓)의 거주지라 하여 현으로 강등되었다가(『광해군일기』 4년 6월 14일) 다시 도호부로 승격되었다. 1671년(현종 12)에 향리가 부사를 총으로 쏘아 죽인 사건이 일어나 현으로 강등되었다가 (『현종실록』 12년 11월 11일), 1762년(영조 38)에 다시 도호부로 복구되는 등 읍격의 승강이 여러 차례 있었다. 1895년(고종 32)에 전국을 23부로 개편할 때 해주부 서흥군이 되었고, 1896년(고종 33)에 13도제가 시행될 때 다시 황해도 서흥군이 되었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여지도서(輿地圖書)』황해도(黃海道) 서흥(瑞興)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고승희, 「조선후기 함경도 內地 방어체계」, 『한국문화』38,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