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덕현(盈德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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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경상북도 영덕군 영덕읍 지역을 중심으로 편성되었던 조선시대의 관청이자 행정구역.

개설

영덕현(盈德縣)은 삼국시대에 야시홀군(也尸忽郡)에서 기원한다. 신라 경덕왕 때 야성군(野城郡)으로 개명하여 두 곳의 영현(領縣)을 거느렸다. 고려시대에는 영덕군으로 개명하여 예주(禮州: 현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일대)의 소속이 되었다. 영덕에는 고려중기에 감무(監務)가 파견되었다가 얼마 후에 현령(縣令)이 파견되었다. 영덕현은 조선 건국 후에도 유지되다가, 15세기에 한때 현령 대신 지현사(知縣事)가 파견된 적도 있었으나, 다시 현령으로 환원되어 조선후기까지 이어졌다. 1895년(고종 32)에 영덕군으로 바뀌었으며, 영덕군은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조선시대에 영덕현의 중심지는 현재 경상북도 영덕군 영덕읍 지역에 위치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영덕현은 삼국시대에 야시홀군이었는데, 신라 경덕왕 때 야성군으로 개명하였다. 고려초기에 영덕군이 되었으며, 1018년(고려 현종 9)에 예주에 소속되었다. 고려중기에 감무를 두었다가 다시 현령관을 설치하여 영덕현이 되었다. 조선시대에도 그대로 영덕현이 유지되었으며, 현령이 임명되었다.

조직 및 역할

영덕현은 신라 경덕왕 때 9주 중 명주(溟州) 경내의 야성군으로 편성되어 진안현(眞安縣: 현 경상북도 청송군 진보면 일대)과 적선현(積善縣: 현 경상북도 청송군 청송읍 월막리 일대) 두 곳의 영현을 거느렸다. 당시 야성군에는 지방관으로 군태수(郡太守)가 파견되었다. 야성군은 고려시대에 들어와 영덕군이 되어 예주의 소속으로 편성되었다. 12세기경에 감무가 파견되었다가 얼마 후에 현령관을 설치하였다. 조선 건국 후에도 영덕에는 그대로 현령이 임명되었다. 고려시대에 영덕에는 중앙에서 파견된 현령관이 근무하는 외관청(外官廳)과 별도로 읍사(邑司)가 설치되어 토착의 향리(鄕吏)들이 자치적으로 지방 행정업무를 수행하였다. 조선시대에는 고려시대와 달리 향리의 권한과 지위는 약화되고 영덕현령에게 모든 권한이 집중되었다.

『경국대전(經國大典)』과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영덕현에는 종5품의 현령과 종9품의 훈도(訓導)가 파견되었다. 18세기에 편찬된 지리서인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의하면 영덕현에는 5품의 음관(蔭官)이 현령으로 임명되며, 좌수(座首) 1명, 별감(別監) 2명, 군관(軍官) 20명, 인리(人吏) 30명, 지인(知印) 20명, 사령(使令) 17명, 관노(官奴) 24명, 관비(官婢) 14명이 편성되었다. 『대전회통(大典會通)』에도 영덕에는 종5품의 현령이 임명된다는 내용이 있다. 조선시대 영덕현의 읍치와 관아는 현재 경상북도 영덕군 영덕읍 일대에 위치하였다.

변천

영덕현에는 조선 건국 후인 1415년(태종 15)에 지현사를 두었다가 세종 연간에 영덕현령으로 환원한 것으로 여겨진다. 지현사를 두었던 이유는 동해안의 방비를 강화하기 위해서였다. 영덕현령의 기록은 1448년(세종 30)에 확인되므로(『세종실록』 30년 3월 10일), 그 이전에 영덕현령으로 환원된 것이다. 이후 조선시대에 영덕현은 연혁에서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1895년에 전국을 23부로 나누었을 때 영덕현은 영덕군이 되어 안동부(安東府)의 관할에 속했다. 1896년(고종 33)에 13도제가 실시되면서 영덕군은 경상북도 관할의 4등군으로 편제되었다. 영덕군은 이후에도 유지되었으며, 현재도 영덕군으로 존속하고 있다.

참고문헌

  • 『삼국사기(三國史記)』
  • 『고려사(高麗史)』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志)』
  • 『대동지지(大東地志)』
  • 『신구대조조선전도부군면리동명칭일람(新舊對照朝鮮全道府郡面里洞名稱一覽)』
  • 『여지도서(輿地圖書)』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