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업시험장(鹽業試驗場)

sillokwiki
Silman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7년 12월 10일 (일) 01:50 판 (XML 가져오기)

(차이) ← 이전 판 | 최신판 (차이) | 다음 판 → (차이)
이동: 둘러보기, 검색



1908년(융희 2) 통감부 주도하에 염업의 조사와 시험을 위해 설치한 관청.

개설

염업시험장은 일본이 통감부 설치 이후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대한제국 황실 재정에서 국가 재정으로 이관되면서 중시된 염세(鹽稅)와 관련되어 염업의 조사와 시험 등에 관한 일을 담당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일본은 러일전쟁 이후 재정고문을 파견하여 시정(施政)을 개선시킨다는 명목으로 조선을 식민지화하기 위해 각종 재정 정리 사업을 전개하였다. 이와 함께 일본은 재원을 확보하고 세입을 늘릴 수 있는 상품의 조사 사업에 착수하였다. 1907년에 시작된 염업(鹽業) 조사도 이러한 사업의 일환이었다. 같은 해에는 천일제염(天日製鹽)을 시험하기 위해 대장성(大藏省)의 기사 오쿠겐조[奧建藏]를 초청하였다. 1908년 그의 조사와 자문에 기초하여 염업 시험장을 설치하였다.

조직 및 역할

1908년 3월 5일 칙령으로 「염업시험장 관제」를 반포하고(『순종실록』 1년 3월 5일), 염업시험장 및 염업시험장출장소를 설치하였다. 염업시험장은 농상공부 대신의 관할에 두었다. 소관 업무는 ‘염업의 개량·발전에 연관되는 조사와 시험의 사무’였다. 염업시험장출장소는 주안(朱安)과 용호(龍湖)에 설치되었다. 직원은 책임자인 장장(場長) 1명, 기사(技士) 3명, 기수(技手) 15명, 서기(書記) 10명을 두었다. 장장은 기사로 충원하도록 하였다. 기사는 장무(場務)를 분장(分掌)하고 기수는 장무에 종사하며 서기는 서무 및 회계를 담당하였다. 이 시험장에 임명된 직원은 대부분 일본인이었다.

경기도 인천부 주안면 십정리에 1정보(町步) 즉 약 3,000평의 천일염전과 경상남도 동래부 석남면 용호리에 일본식 입빈풍(入濱風) 전오염(煎熬鹽) 시험장을 만들었다. 여기서 약 1년간 천일염과 전오염을 시험적으로 생산하였다.

변천

염업시험장은 1909년 2월 폐지되었으며(『순종실록』 2년 2월 18일), 주안의 염업시험장은 1910년 조선총독부 전매국 주안출장소로 변경되었다.

참고문헌

  • 『구한국관보(舊韓國官報)』
  • 농상공부 수산국, 『韓國水産誌』1권, 1908 ; 이근우 등 옮김, 『한국수산지 1-2』, 새미, 2010.
  • 이근우·신명호·심민정 역; 일본 농상공부 수산국 편, 『한국 수산지(韓國水産誌): 100년 전 일본인이 본 우리의 바다(1~2)』, 새미, 2010.
  • 탁지부 임시 재원 조사국, 『한국 염업 조사 보고서』, 1907.
  • 유승훈, 「20세기 초 인천 지역의 소금 생산: 천일염을 중심으로」, 『인천학연구』3, 2004.
  • 이영학, 「개항기 제염업에 대한 연구: 자본제적 경영을 중심으로」, 『한국문화』12, 1991.
  • 田中正敬, 「近代朝鮮における鹽業需給と鹽業政策」, 一橋大 박사학위논문, 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