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창양행(世昌洋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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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4년(고종 21) 독일 상인 마이어(E. Meyer)가 인천 제물포에 설립한 우리나라 최초의 외국인 무역상사.

개설

개항 이후 인천에 진출한 독일계 상인자본으로 설립된 외국인 회사 세창양행(世昌洋行)은 초기에 한국의 고위 관료인 독일인 묄렌도르프([穆麟德], Paul George von Möllendorff)의 후원 아래 상업적 성공을 거두었다. 이후에도 독일의 지원을 받으며 일반 무역활동은 물론 각종 이권 사업에 참여하며 당시 조선의 사회에 큰 영향력을 끼쳤다.

설립 경위 및 목적

1883년 독일은 조선과 한독통상조약(韓獨通商條約)을 체결하고 조선에서 제국주의적 이권을 확보하려고 노력하였다. 이 구상은 청국 정부에서 관리로 근무했던 묄렌도르프가 한국의 외교 고문관 겸 통상업무의 총괄자로 부임하면서 구체화되었다. 그는 독일 함부르크에 본사를 두고 톈진[天津], 홍콩 등에 지사를 설치하여 무역사업을 하던 마이어상사와 접촉하여 제물포에 지사 설립을 추진하였다.

드디어 당시 톈진의 마이어 지사에 근무하던 볼터([華爾德], Cal Walte)가 1884년 5월 제물포에 도착하여 건물을 짓고 세창양행[Edward Meyer & Co]을 설립하였다.

조직 및 역할

세창양행은 현재 인천시 중앙동에 단층 양옥을 짓고 볼터가 중심이 되어 무역활동을 시작하였다. 이후 독일인 류어스[魯伊斯], 바우만[斐禹萬] 등을 불러들여 경영에 참여시켰다. 조선에서 수입해간 물품은 홍삼·지금(地金) 등이었고, 수출한 물품은 면포·철기(鐵器)·인쇄기계 등이었다.

묄렌도르프의 후원 아래 조선 정부와 본격적으로 사업을 전개한 것은 조폐(造幣) 관련 일이었다. 1883년 근대적 화폐의 주조를 위한 조폐기관인 전환국(典圜局)이 설치되었는데, 이에 필요한 독일 조폐기계 수입과 독일 기술자 초빙 알선을 세창양행이 담당하였다.

세창양행이 조선에서 확고한 기반을 얻을 수 있었던 계기는 1885년 조선 정부에 2,000파운드를 2년 상환, 연리 10%의 조건으로 차관을 제공하면서부터이다. 당시 조선 정부는 ‘한성조약’으로 인한 일본에 대한 배상금 지불로 재정이 궁핍한 상태였다. 세창양행은 이 차관을 제공한 대가로 1886년부터 1년 동안 호남지역의 세곡(稅穀)을 운송하는 권리를 획득했다.

세창양행이 추진한 이권사업 중에는 철도부설권과 전복채취권의 획득도 있었다. 철도부설권 획득에는 실패했지만 전복채취권은 얻어 남해 등지에서 조선인을 고용해 전복을 채취하여 이익을 얻었다.

1897년에는 강원도 당현금광(堂峴金鑛)의 이권을 소유기간 25년, 채광한 금의 1/4을 조선정부에 납부한다는 조건으로 획득하였다. 해운사업도 지속적으로 추진하여 인천-상하이[上海] 간의 정기항로를 개척하였고, 이후 세창양행은 인천을 거점으로 상해·홍콩·톈진까지 거래처를 확장하였다.

한편 세창양행의 인천-상하이-홍콩의 정기노선은 1910년 국권 상실 후 독립운동가들의 합법·비합법 운송수단으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변천

1900년 6월 서울에 지점을 설치하였다. 1907년 볼터는 마이어양행 제물포지점을 단독으로 인수하여 칼 볼터양행이라 개칭하였으나, 한국 이름인 세창양행을 고수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일본으로부터 적국 재산이라는 취급을 받아 독일인의 출자가 동결되었다. 1945년 해방 이후 재기를 추진하였으나 한국전쟁으로 좌절되었다.

참고문헌

  • 『황성신문(皇城新聞)』
  •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구한국외교문서』, 1966.
  • 묄렌도르프(고병익 역), 「목인덕수기(穆麟德手記)」, 『진단학보』24, 1963.
  • 이배용, 「개항 이후 독일의 자본침투와 세창양행」, 『한국문화연구원논총』48, 1986.
  • 조흥윤,「세창양행, 마이어, 함부르크 민족박물관」, 『동방학지』46·47·48,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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