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수부(三水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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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함경도 삼수 지방을 관할하던 관청이자 행정구역.

개설

삼수부(三水府)는 1462년(세조 8) 설치되어 1895년(고종 32) 관제 개혁에 따라 삼수군(三水郡)으로 바뀔 때까지 함경도 삼수 지방을 관할하는 행정구역으로 기능하였다. 진관(鎭管) 체제 아래의 독진(獨鎭)으로 병마첨절제사(兵馬僉節制使)를 겸하였으며, 진영장(鎭營將) 체제에서는 우영장(右營將)을 맡았다. 함경도의 최북단으로 육진(六鎭)과 함께 전략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조선시대 함경도의 행정·군사 중심지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삼수는 본래 갑산(甲山) 소속이었다. 1415년(태종 15) 갑산만호부(甲山萬戶府)를 갑산군(甲山郡)으로 승격시키고, 장관을 지군사(知郡事)라 칭하였다(『태종실록』 15년 12월 7일). 당시 갑산은 여연(閭延), 후주(厚州), 무창(茂昌) 등의 지역을 관할하였다. 이 지역은 갑산군의 삼수보(三水堡)였는데, 1441년(세종 23)에 만호를 두어 적의 길목을 막도록 하였으며(『세종실록』 23년 5월 27일), 1446년(세종 28)에 삼수군을 설치했다(『세종실록』 28년 4월 11일) (『세종실록』 28년 5월 1일). 1454년(단종 2)에 군(郡)을 없애고 만호를 두었다가, 1461년(세조 7)에 도로 군으로 삼았다(『단종실록』 2년 10월 29일) (『세조실록』 7년 8월 8일). 1462년(세조 8)에 도호부(都護府)로 승격시켰다.

조직 및 역할

도호부사(都護府使) 즉 부사(府使)는 조선전기 『경국대전(經國大典)』에는 종3품으로 규정되었지만, 조선후기 『여지도서(輿地圖書)』에는 무관 정3품으로 되어 있다. 임기는 30개월이었다. 『여지도서』에 따르면 부사에 직속된 이속(吏屬)으로 좌수(座首) 1명, 별감(別監) 3명, 군관(軍官) 50명, 아전(衙前) 50명, 지인(知印) 20명, 사령(使令) 23명, 관노(官奴) 18명, 관비(官婢) 15명이 있었다. 진관 체제 아래 독진으로 삼수진관(三水鎭管)을 구성하였으며, 부사가 병마첨절제사를 겸임하였다.

『여지도서』에 따르면 삼수의 관할 행정구역으로는 관아가 소재한 읍사(邑社)를 위시하여 관동사(館洞社), 호야동사(好野洞社), 재전사(財田社), 인차외사(仁遮外社), 나난사(羅暖社), 소농사(小農社), 갈파지사(乫波知社), 구갈파지사(舊乫波知社), 자작사(自作社), 어면사(魚面社), 강구사(江口社), 신방사(神方社), 묘파사(廟坡社), 별해사(別害社)의 15사(社)가 있었다.

변천

1464년(세조 10)에 다시 군으로 강등시켰다. 1693년(숙종 19)에 부사가 우영장을 겸임했다. 1696년(숙종 22)에 모반한 죄인 이동량(李東樑)이 태어난 곳이라는 이유로 군을 현(縣)으로 강등시켰다. 1710년(숙종 36)에 다시 삼수와 갑산은 최북단에 있으므로 육진과 다름이 없다 하여, 이미 도호부였던 갑산과 같이 삼수도 도호부로 승격시켰다. 1895년(고종 32) 지방관제가 대구역주의인 8도제에서 소구역주의인 23부제로 바뀔 때에 갑산부(甲山府) 소속의 삼수군이 되었다(『고종실록』 32년 5월 26일).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속대전(續大典)』
  • 『대전통편(大典通編)』
  • 『대전회통(大典會通)』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여지도서(輿地圖書)』
  • 손정목, 『한국지방제도·자치사연구(상)』, 일지사,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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