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전(時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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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함경도 경흥의 맞은편에 위치한 여진 번호 부락.

개설

시전은 함경도 경흥부(慶興府) 무이보(撫夷堡)의 맞은편에 있는 여진 번호(藩胡) 부락이다. 조선전기 내내 골간올적합(骨看兀狄哈)이 시전에 거주하였고, 이들은 조선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다. 그러나 1587년에 골간올적합이 경흥의 녹둔도(鹿屯島)를 공격하였고, 이듬해 1월에 북병사(北兵使)이일은 시전 부락을 공격하여 큰 피해를 입혔다. 이후 누르하치가 이 지역 여진인을 이주시킬 때 상당수가 편입되었다.

변천

시전은 골간올적합이 주로 거주하는 지역이다. 시전이 처음으로 사료에 등장한 것은 1460년(세조 6) 12월로, 세조가 조선에 온 여러 여진인 추장에게 관직을 제수할 때, 지휘(指揮)은쇄실합(殷鎖失哈)을 시전의 부만호로 임명한 것이었다(『세조실록』 6년 12월 29일). 이 지역의 골간올적합은 조선건국 이후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으나, 1552년(명종 7) 10월에 ‘서수라(西水羅) 사건’이 발생하며 틀어졌다. 이 시기 시전에 거주한 나시합(羅時哈)은 오히려 조선에 적의 침입 정보를 제공하며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다(『명종실록』 9년 6월 5일).

1583년(선조 16)에 일어난 ‘니탕개(尼蕩介)의 난’을 계기로 조선에서 변경을 강화하기 위하여 경흥의 녹둔도에 둔전(屯田)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1587년에 골간올적합이 녹둔도를 공격하여 둔전을 폐기하였다. 이에 조선의 위신이 크게 실추되어 보복하자는 의견이 팽배해졌다. 결국, 1588년 1월에 북병사(北兵使)이일이 시전 부락을 공격하여 가옥 200여 채를 불태우고, 383급을 참획하였다(『선조실록』 21년 1월 27일)(『선조수정실록』 21년 1월 1일). 이에 선조는 이일과 병사들의 공로를 위로하기 위하여 잔치를 베풀기도 하였다(『선조실록』 21년 5월 20일).

그런데 조선군이 시전 전투에서 완벽하게 승리한 것은 아니었다. 몇 개월 후에도 이들은 배를 타고 서수라의 난도(卵島) 등을 공격하였고, 그 전에도 몰래 나타나 조선의 백성과 소를 노략하였다(『선조실록』 21년 6월 14일). 하지만, 이때의 정벌은 선조대 여진족 정토(征討)의 전범(典範)으로 작용하였다. 따라서 조선에서 정토를 논의할 때마다 시전 전투가 언급되었다(『선조실록』 32년 8월 4일)(『선조실록』 32년 12월 12일)(『선조실록』 34년 2월 15일).

1603년과 1605년에 두만강 유역을 공격하였던 오랍(烏拉)의 포점태(布占泰)는 시전의 번호까지 공격하여 약탈하였다(『선조실록』 36년 12월 28일) (『선조실록』 38년 5월 19일). 또한 1609년(광해 1) 1월에 ‘오갈암(烏碣巖)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누르하치[奴兒哈赤, 老乙加赤]가 두만강 유역의 주도권을 차지하였다. 이후 누르하치의 군대가 두만강 연안의 번호를 쇄환해 갈 때에 시전 부락을 공격하였다(『선조실록』 36년 12월 28일).

참고문헌

  • 『국조보감(國朝寶鑑)』
  • 『난중잡록(亂中雜錄)』
  • 『계곡집(谿谷集)』
  • 『학봉전집(鶴峯全集)』
  • 『제승방략(制勝方略)』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성호사설(星湖僿說)』
  • 강신엽, 「조선중기 이일의 관방정책」, 『학예지』 5, 1997.
  • 김구진, 「조선시대 6鎭 방어 전략-制勝方略체제의 연구-」, 『백산학보』 71, 2005.
  • 박정민, 『조선시대 여진인 내조 연구』, 경인문화사, 2015.
  • 서병국, 『宣祖時代女直交涉史硏究』, 교문사, 1970.
  • 이원명, 「조선중기 鹿屯島 확보와 北兵使 李鎰에 관한 일고찰」, 『백산학보』 83,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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