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당창(聖堂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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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전라도 함열에 설치되어 전세와 대동세 등을 수봉하던 조창.

개설

조선전기 함열에는 성당창의 전신으로 덕성창(德城倉)이 존재하였으나 지리적인 여건으로 인하여 군산·옥구·여산 등 다른 지역으로 이전을 거듭하다가 17세기 전반 다시 함열에 자리 잡았다. 조선후기 옥구군산창(群山倉), 영광법성창과 함께 전라도의 3조창이었다. 인근의 금강 하류에 군산창이 있었기 때문에 조선후기 합설 논란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세기 후반까지 유지되어 전라도 산간 군현 8읍의 세곡을 보관하는 조창으로서의 역할을 다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조운제는 왕조 국가의 국가 재원인 세곡을 경창으로 운반하기 위한 제도였다. 고려 조정에서는 세곡의 안정적인 수급과 조달을 위하여 조운제를 정비하였다. 그러나 고려말 왜구의 침략으로 조창·조선·조군을 기반으로 하는 조운제는 위기에 봉착하였다. 이를 해결하고자 창고를 보호하는 조전성(漕轉城) 수축과 수참(水站) 설치 등의 조운 복구책이 시도되었고, 이는 조선왕조 조운제도의 밑거름이 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 속에서 조선시대에도 전국 수로와 해로 교통의 요지에 조창이 설치되었다. 그중 전라도에는 나주영산창(榮山倉)과 용안득성창(得成倉)이 설치되었다. 영산창은 전라도 남부 지역의 세곡을, 득성창은 전라도 북부 지역의 세곡을 각각 수봉하였다. 그러나 1428년(세종 10) 득성창의 수로가 막히는 바람에 전라도 함열로 창고를 이전하고 명칭을 덕성창으로 바꾸었다(『세종실록』 10년 12월 22일). 덕성창은 성당창의 옛 이름이었다.

조직 및 역할

조운을 관리하는 책임자로는 전함사(典艦司) 소속의 종5품 수운판관(水運判官) 2명과 해운판관(海運判官) 1명이 있었다. 수운판관 2명 중 1명은 좌수운판관으로 강원도·충청도·경상도, 또 다른 1명은 우수운판관으로 황해도의 세곡 수운을 주관하였고, 해운판관은 충청도와 전라도의 조운을 관할하였다. 성당창에는 봉세청(捧稅廳)·사공청(沙工廳)·순풍당(順風堂)·창고(倉庫) 등의 건물이 있었다. 봉세청은 조운 책임자가 머무르는 곳이고, 사공청은 조군을 지휘하는 선장의 집무실이며, 항해의 안전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내는 공간이었다. 한편 세곡을 보관하는 창고로는 4채가 있었다. 조창에는 세곡의 수봉과 보관을 담당하던 서기 1명, 사령 1명, 급창 1명, 주자 1명, 통인 1명 등이 있었다. 그리고 평시에는 이와 별도로 고직 2명을 두어 세곡 간수(看守)에 힘쓰게 하였다. 창고는 3년·5년 혹은 10년마다 이를 주관하는 감독관이 번고(反庫)를 행하여 현품과 장부를 대조하고 그 부정 여부를 검사하였고, 재고품의 보존 상태를 확인하였다. 정기적 번고 이외에도 필요시에는 임시로 행해지기도 하였다. 성당창에서는 8읍에서 수봉한 세곡을 3월 15일까지 조선에 적재하여 발선한 다음 4월 10일 이전까지 서울의 경창(京倉)에 상납해야 하였다. 함열에서 출발한 조선은 임천·임피·한산·옥구·서천·남포·홍주·태안·면천·남양·인천·부평·통진·교하·양천·고양을 거쳐 서강에 도착하였다. 이때 조선의 파선이나 탈취를 방지하기 위하여 조창 지역의 첨사(僉使)와 만호(萬戶)를 압령관(押領官)으로 임명하였는데, 성당창의 경우 군산첨사가 담당하다가 1791년(정조 15)부터는 함열현감이 직접 담당하였다.

변천

함열에 있던 덕성창은 수로가 멀고 험난하다는 이유로 1487년(성종 18) 용안으로 다시 이전하였다. 그러나 중종 7년(1512) 득성창 역시 해구(海口)로부터 멀 뿐만 아니라 운항이 쉽지 않다는 이유로 옥구의 군산포(群山浦)로 조창을 옮겼다(『중종실록』 7년 9월 27일). 하지만 서해안에 치우진 군산창에서 전라도 산군 일대의 곡식을 수납하기가 용이하지 않자 17세기 초반에는 여산의 나암창(羅巖倉)에서 전라도 산군 지역의 세곡을 수봉하였다. 그리고 나암창의 수로가 막히자 다시 함열의 진포(鎭浦)에 조창을 설치하고, 함열(咸悅)·고산(高山)·진산(珍山)·익산(益山)·금산(錦山)·용담(龍潭)·남원(南原) 등 8읍의 전세와 대동미를 수봉하게 하였다. 이 조창이 바로 성당창이었다. 17세기 전반에 다시 설치된 성당창은 19세기 후반까지 군산창·법성창과 함께 전라도 3조창으로 그 기능을 수행하였다. 조창에는 세곡을 운송할 조선과 이 선박에 승선하는 조군이 배치되었는데 조선전기 함열 성당창의 경우 조선 63척과 조졸 2,422명이 각각 배치되어 있었다. 그러나 조선후기에는 사선임운의 성행으로 조창에 수봉되는 세곡이 줄어들었다. 이에 따라 18세기 중엽에는 조선 11척과 조군 528명만 남게 되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속대전(續大典)』
  • 『대전통편(大典通編)』
  • 『여지도서(輿地圖書)』
  • 『탁지지(度支志)』
  • 『만기요람(萬機要覽)』
  • 최완기, 『朝鮮後期 船運業史硏究』, 일조각, 1989.
  • 김옥근, 「朝鮮時代 漕運制 硏究」, 『경제학연구』 29, 한국경제학회, 1981.
  • 안길정, 「『조행일록』으로 본 19세기 조운의 운영실태」, 『사림』 29, 수선사학회, 2008.
  • 최근묵, 「朝鮮時代의 漕運에 관한 考察」, 『인문학연구』 3-2, 충남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1976.
  • 최완기, 「朝鮮前期 漕運試考-그 運營形態의 變遷過程을 중심으로-」, 『백산학보』 20, 백산학회, 1976.
  • 한정훈, 「조선 건국기 漕運體制의 정비와 그 의미」, 『진단학보』120, 진단학회, 2014.
  • 吉田光男, 「李朝末期の漕倉構造と漕運作業の一例-『漕行日錄』にみる1875年の聖堂倉-」, 『조선학보』 113,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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