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리겁아(撒里怯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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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기즈칸의 4대 궁궐 중 하나가 위치하던 초원으로, 명나라의 몽골 토벌군이 지나간 지역.

개설

살리겁아(撒里怯兒)는 몽골어 사아리 헤에르(Sa’ari ke’er)의 한자 음역으로, ‘건천 혹은 자갈이 있는 초원’이란 뜻이다. 이 지명은 12세기 말에 최초로 사서에 등장하였다.

이 지역에 칭기즈칸의 4대 오르두(ordu, [궁전]) 중 태후 부르테(Börte)의 할리우타이(Qaliutai)라는 궁궐이 있었다. 몽골제국 이후 시기에 몽골을 토벌하러 간 명나라 군대가 이 지역을 지나가기도 하였다.

내용 및 특징

이곳의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는데, 셀렝게강 유역, 오논강 유역, 헤를렌강 유역 등의 설이 있다. 그중 가장 설득력 있는 설은 헤를렌강 유역으로 보는 설이다. 남류하던 헤를렌강이 꺾이며 동류하는 만곡부에서 약간 동쪽으로, 오늘날 바가노르(Baganuur) 근처라고 추측한다.

몽골 사료에 나오는 사아리 헤에르라는 지역은 사건마다 서로 멀리 떨어진 지역을 가리키고 있어, 사아리 헤에르라는 지명이 한 군데가 아니라 두 군데 이상 있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다만 명나라 군대가 도달하였다는 사아리 헤에르는 헤를렌강 유역에 있었음이 분명하다. 『조선왕조실록』에서 1410년대의 명 영락제의 몽골 친정과 관련하여 살리겁아가 등장하는데, 영락제가 육군(六軍)을 거느리고 살리겁아의 땅에 이르니, 적병(賊兵)이 내습하여 일격에 적을 패주(敗走)시켰다는 기록이 있다(『태종실록』 14년 9월 19일).

참고문헌

  • 『원조비사(元朝秘史)』
  • 屠寄, 『蒙兀兒史記』, 內蒙古人民出版社, 2007.
  • Х. Пэрлэй, “‘Монголын нууц товчоо’-ны газар усны нэрийн тухай урьдчилсан мэдээ”, Шинжлэх ухаан-Наука №3, 1949. (Kh. 페를레, “‘몽골비사’에 나오는 지명에 대한 예비보고”, 『과학』 №3, 1949.)
  • Сайшаал, Чингис хааны товчоон, Дээд дэвтэр, ӨМАХХ, 1990. (사이샬, 『칭기즈칸 약사』 상권, 내몽골인민출판사, 19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