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경계(同庚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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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서로 나이가 같거나 같은 해에 과거에 급제한 사람끼리 친목 도모 혹은 상부상조를 목적으로 조직한 계.

개설

동경계(同庚契)는 나이가 같은 동갑계(同甲契)와 같은 해에 과거에 급제한 동경계가 합쳐진 말로 동년, 동방(同榜)의 모임과 결속, 친교를 상징한다. 동갑계는 그 구성원의 범위가 촌락을 단위로 한 것이 많았지만, 면과 군을 단위로 한 것도 상당수 있었다. 동갑계 모임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린 계회도(契會圖)가 전하며 비밀 결사인 동갑계, 불교 사찰의 동갑계도 조직되어 상호간의 친목을 도모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갑계(甲契)는 동갑계와 같은 말이며, 동경(同庚)은 같은 해에 과거에 급제하여 방목(榜目)에 오른 사람을 말한다. 동경계의 연원은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지만, 친목 도모를 목적으로 하는 계는 고려시대, 혹은 그 전부터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사계(射契)·시계(詩契)·동의계(同義契)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조직 및 역할

조선시대에 정착한 유교도 갑계의 형성과 성행에 일정한 영향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유교 규범에 지배 받던 촌락 사회 안에서는 연령의 차에 따른 엄격한 위계질서가 형성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동년배끼리 강한 동류의식을 지니게 되어 갑계를 형성하게 되었을 것이다. 갑계는 그 구성원의 범위가 촌락을 단위로 한 것이 많았지만, 면과 군을 단위로 한 것도 상당수 있었다. 촌락 안의 동년배 수가 얼마 안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었다. 촌락에서 형성된 갑계는 기존의 유대감을 재확인, 강화하기 위해 조직되었을 것이며, 촌락의 범위를 벗어나는 갑계는 갑계의 조직을 통해 이전에 없었던 유대 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다.

불교 사찰에서도 동갑계가 조직되었는데, 동갑 또는 비슷한 연령의 승려들이 모여 계원 상호간의 친목을 도모하였다. 18세기 후반 이후로는 사찰의 보수를 목적으로 동갑의 승려들이 동갑계를 구성하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승려의 수가 적은 사원의 경우는 비슷한 연령으로 구성하기도 하였다. 계원의 수는 10여 명에서 40여 명에 이르기까지 사원의 형편에 따라 달랐다. 사명 대사 유정(惟政)의 갑회문(甲會文)이 전해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중기에는 사찰의 동갑계도 성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사찰에서 갑계가 가장 활발하게 이루어진 시기는 19세기 이후이며, 갑계 활동이 가장 활발했던 범어사(梵魚寺)에는 12기의 갑계 보사비(補寺碑)가 남아 있고, 통도사(通度寺)에도 2기가 남아 있다.

변천

동갑계 모임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린 16세기 전반의 「신해생갑회지도(辛亥生甲會之圖)」가 현재 전하고 있다.

변중량(卞仲良)은 고려 공양왕의 사위인 익천군(益川君)왕즙(王緝)과 동경계를 맺었으며[『태조실록』 총서 128번째 기사], 1431년(세종 13) 세종은 황희·맹사성 등과 이양(李揚)의 직첩(職牒)을 되돌려 주는 일을 논의하는 가운데 일찍이 태종과의 동경 서약문[同庚誓文]에 ‘사생(死生)을 같이 한다’는 기록이 있다고 하였다(『세종실록』 13년 12월 5일). 1596년(선조 29) 7월 임진왜란으로 전국이 초토화되던 시기에 민심이 극도로 동요된 틈을 타서 왕실의 종친인 이몽학(李夢鶴)은 비밀 결사인 동갑계 회원 700명과 함께 굶주린 농민을 선동하여 홍산 무량사에서 반란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 김갑주, 『조선시대 사원 경제 연구』, 동화출판공사, 1983.
  • 한상복, 「한국의 촌락관행」, 『(한국문화시리즈 6) 한국의 사회』, 시사영어사, 1982.
  • 이제창, 「조선시대 승려 갑계(甲契)의 연구」, 『불교학보』13, 19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