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전기주식회사(京城電氣株式會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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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이 1898년에 설립한 한성전기를 모체로 일제강점기에 전기·전차·가스 사업을 벌였던 전기회사.

개설

1897년(고종 34) 대한제국이 성립한 후 근대산업 육성책의 하나로 전력 개발을 중시하면서 이를 담당할 황실기업으로 한성전기회사를 설립하였다. 공사대금 체불이 빌미가 되어 콜브란이 회사의 경영권을 장악하였고, 1904년(고종 41) 7월 미국 코네티컷 주 하트포드(Hartford)에서 한미전기회사를 설립했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전력사업을 장악하기 위해 시부사와 에이이치[澁澤榮一]를 중심으로 하여 일한와사(日韓瓦斯)를 설립하고, 1909년(순종 2) 7월에는 한미전기를 인수하며 일한와사전기로 상호를 바꾸었다. 1915년 9월에는 다시 회사명을 경성전기주식회사로 바꾸어 1961년까지 존속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1897년 대한제국이 성립하면서 근대산업 육성정책을 본격 추진하자, 전력 개발이 중요한 이슈로 등장하였다. 1898년(고종 35) 1월 18일 이근배와 김두승이 한성부 내의 전차, 전등, 전화를 경영할 목적으로 농상공부에 한성전기회사의 설립을 청원했다. 1주일 뒤인 1월 26일 정부에서 이를 인가하면서 대한제국의 전력 개발 사업은 본격화되었다. 한성전기회사는 전차, 전등, 전화 등 3개 사업 부문을 계획하고, 총 30만 원의 자본금 규모로 설립되었다. 정부로부터 향후 35년간 황실 내와 한성 오서구(五署區) 내 독점 공급권을 허가받았다. 하지만 실제로 사업에 착수한 부문은 전차와 전등뿐이었다. 한성전기는 설립 당시 민간회사의 형태를 빌렸지만, 실질적으로는 자본금 전액을 황실에서 출자한 일종의 ‘황실기업’이었다.

변천

한성전기는 약 41만 원에 달하는 공사대금을 절반밖에 지불하지 못하고 콜브란에 부채를 지게 되었다. 그에 따라 1899년 8월 22일에는 한성전기회사와 콜브란 측 사이에 저당권설정계약이 체결되었는데, 콜브란 측은 그간의 부채를 빌미로 저당계약과 운영계약을 체결해 한성전기의 재산과 특허권을 저당하고 부채를 갚을 때까지 운영권을 장악하고 보수는 별도로 수취했다. 콜브란 측은 부채 상환일을 연장해주는 대가로 한성전기와 대한제국 정부로부터 각종 권한을 확보하여 대대적인 경영 확장을 도모했다.

러일전쟁 이후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한국 정부는 미국 등 다른 열강의 지원을 필요로 했다. 이에 한국 정부는 미국과의 관계 강화의 한 방책으로 콜브란 측과의 채무분규 타결을 급히 서둘렀다. 1904년 2월 11일 이학균과 샌즈를 콜브란에게 보내 그간의 채무분규를 타결하기 위해 현금 70만 원을 주는 대신 한미전기회사를 설립하여 모든 권리와 자산을 이 회사에 인계하고 주식의 절반은 광무 황제가 인수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또 황궁 내의 전등 설비도 콜브란 측에 인도하고 궁내부 소속 광산의 개발권을 줄 것도 약속했다. 그 결과 2월 13일자로 궁내부와 콜브란 측 사이에 광산 개발권에 관한 계약이 체결되었다. 그리고 2월 19일에는 광무 황제대표원인 이학균과 콜브란 측 간에 한성전기 채무분규를 타결 짓는 계약이 체결되었다. 광무 황제가 현금 40만 원(일화)과 무이자에 지급기간 1903년 5월 13일이라는 조건 아래 약속어음 35만 원을 지불하는 대신 양측 간에 일체의 요구를 상호 철회하기로 했다.

어음의 지불 이후 콜브란 측은 본격적으로 회사 설립에 착수하여, 1904년 7월 18일 미국 코네티컷 주 하트포드에서 자본금 100만 불, 일화로 200만 원의 유한회사로 한미전기회사를 설립했다. 1905년 8월 당시 사장과 부사장은 각각 콜브란과 보스트위크였으며, 콜브란 측과 광무 황제가 주식을 절반, 즉 5천 주씩 소유하고 있었다. 서울에 지사를 설립할 수 있다는 회사 정관에 따라 8월 1일에는 서울 지사가 설립되어 종로 사옥에 한미 양국의 국기를 게양하고 본격적인 영업을 개시했다.

러일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이후 일제는 통감부를 통해 한반도를 식민지 경제구조로 개편하기 위한 갖가지 정책을 대한제국에 강요하였다. 한국을 식민지화하기 위해서는 근대 상공업 발전의 기초산업인 전력산업의 장악은 무엇보다 시급한 과제였다. 통감부는 다양한 방법을 동원해 콜브란 측의 경영활동에 제약을 가했지만, 미국과의 외교관계 악화가 우려되었다. 콜브란 측과의 분쟁을 피하고 전력산업을 장악하는 길은 궁극적으로 이들의 권리를 매수하는 방법밖에는 없었다.

시부사와 에이이치는 동경와사와 제일은행의 주요 인물들을 중심으로 통감부와의 긴밀한 사전 협의를 거쳐 1907년 3월 경성부 이사청 경유로 통감부에 가스사업 허가권을 신청하여, 6월에야 허가권을 취득할 수 있었다. 1907년 11월 12일 도쿄 은행집회소에서 발기인회가 개최되어 위원장 시부사와, 오오하시 신타로[大橋新太郞], 오쿠라 기하치로[大倉喜八郞] 등이 주요 발기인으로 참가했다. 창립사무소는 동경와사 내에 설치했다. 그러나 1907년 이래의 재계 불황과 금융경색으로 인해 주식 모집이 여의치 않았다. 일한와사의 창립이 지연되어 1908년 9월 30일에야 창립총회가 도쿄의 은행집회소에서 개최되었다. 본점을 도쿄에 두고, 서울에 지점을 설치하였는데, 총주식 6만 주 가운데 484명의 재일 일본인이 5만 880주, 29명의 재한 일본인이 2,820주, 19명의 한국인이 2,300주, 그리고 궁내부가 4,000주를 인수하였다.

일한와사는 창립 이후 제일 먼저 일제의 지도 아래 한미전기회사의 매수 공작에 착수하였다. 콜브란과 매수 협상을 벌여 전체 120만 원에 한미전기의 특허, 권리, 자산, 재산을 인수(광무 황제 지분 포함)하고 50만 원의 사채를 계승하기로 합의하였다. 마침내 1909년 6월 24일 요코하마인터내셔널은행에서 콜브란과 일한와사 전무 오카자키 토오미쓰[岡崎遠光] 사이에 정식 계약이 체결되었다. 계약 체결 후 일한와사에서는 1909년 7월 2일 대주주상담회와 1909년 7월 21일 임시주주총회를 개최하여 한미전기의 사업 일체 매수에 대한 주주들의 최종 승인을 받았다. 정관도 개정하여 상호를 일한와사전기(주)로 개칭하고 영업 분야에도 전차, 전등, 전력 등을 추가하였다. 이로써 일한와사전기는 명실상부 한국의 수도 서울의 전기, 전차, 가스를 독점 공급하는 독점기업으로서의 기반을 확고히 구축하였다.

일제강점기 들어 일한와사전기는 은행 자본과의 두터운 관계를 통해 경영 초기 자기자본으로 충당이 불가능한 대규모 자금을 차입할 수 있었다. 1912년부터 차입금을 크게 늘려가던 일한와사전기는 1910년대 중반 경제 불황을 맞아 경영난에 빠졌다. 과다한 차입금으로 재무구조가 악화되고 지출이 증가하면서 순이익률이 하락했다. 경영 혁신을 위한 과감한 조처, 즉 최고경영자의 교체까지를 포함한 특단의 대책이 필요했다. 1915년 회장 타카마츠 토요키치[高松豊吉]가 물러나고 그 자리에 오호아시 신타로[大橋新太郞]가 취임했다. 쇄신의 차원에서 1915년 9월에는 회사명을 경성전기주식회사로 바꾸었다. 이때까지 구황실은 이왕직을 통해 경성전기의 주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에 따라 1915년 하반기 배당금으로 1,050원을 수령하였고(『순종실록부록』 9년 2월 4일), 1916년 하반기 배당금 또한 1,575원에 달했다(『순종실록부록』 10년 1월 29일). 1917년 3월에는 경성전기의 신주 350주를 추가로 인수하기도 했다(『순종실록부록』 10년 3월 12일).

경성전기주식회사가 경영쇄신을 단행한 1910년대 중반 이후 경기는 회복세로 돌아서고 1910년대 말에는 제1차 세계대전을 틈타 일본은 유례없는 전시 호황을 누리고 있었다. 하지만 경성전기주식회사의 ‘극단적인 이윤 극대화’를 내세운 독점적 경영정책은 회사 내외의 반발을 초래했다. 1925년에 경전운수동우회를 중심으로 전차승무원들의 파업이 있었고, 1931년에 경성전기의 독점적 폐해를 해결하고자 공익적 성격을 강조하며 경성부가 전기, 전차, 가스의 부영화(府營化)를 결의했으나, 경성전기의 반대로 좌절되었다.

이후 경성전기는 조선전기사업령의 공포에 수반된 전력통제정책을 배경으로 1939년 춘천전기를 합병하고, 1942년 1월 1일에는 금강산전기철도를 합병했다. 합병 이후 경전의 성격은 크게 변화했다. 일단 중역진이 대거 교체되어 그때까지 경성전기를 이끌었던 오호아시 신타로가 사실상 경영 일선에서 은퇴하고, 그간 경전의 경영을 실질적으로 주도했던 무샤 렌조[武者鍊三] 전무가 잠시 사장에 취임했지만 곧 은퇴하고, 대신 식산국장 출신의 호즈미 신로쿠로[穗積眞六郞]가 사장에 임명되었다. 또한 금강산전기 출신과 총독부 관료 출신들이 대거 중역진에 포진했다. 이와 함께 경성전기 내부에 국가주의 기업경영이념이 확산되면서 경성전기는 ‘전업보국’과 ‘공익우선’의 기업경영을 내세워 일제의 전시통제 경제체제의 구축에 적극 협조하였다. 특히 당시는 대동아공영권 내에서 대륙 전진기지, 병참기지로서 조선의 역할이 강조되면서 경인공업지대의 육성계획이 본격적으로 추진되고 있었다. 경성전기는 이 일대 공장에 전등과 전력을 공급하고 교통 부문의 일각을 담당하면서 그 역할이 중요하게 부각되었다. 전시 말 경성전기의 국가주의 기업경영은 이런 점에서 큰 한계를 내포하고 있었고, 결국 일본제국주의의 종말과 그 운명을 같이할 수밖에 없었다.

경성전기는 해방 후 1961년까지 존속하다가 조선전업, 남선전기와 합병하여 한국전력주식회사가 되었다.

참고문헌

  • 오진석, 「1910~20년대 경성전기(주)의 설립과 경영변동」, 『동방학지』121,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2003.
  • 오진석, 「1930년대 경성전기의 사업부문별 경영분석을 통해 본 대중교통기구로서의 위상」, 『대동문화연구』60, 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학술원, 2007.
  • 오진석, 「1930년대 초 전력산업 공영화운동과 경성전기」, 『사학연구』94, 한국사학회, 2009.
  • 오진석, 『한국근대 전력산업의 발전과 경성전기(주)』, 연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