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위달자(三衛達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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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세기 말 명나라가 흥안령(興安嶺) 동부 지역에 설치한 몽골 우량하이([兀良哈], Uriyangqai) 삼위(三衛)를 지칭하는 말.

개설

삼위달자(三衛達子)는 우량하이 삼위를 한자식으로 표현한 것이다. 8세기 때부터 역사서에 등장한 유목 민족으로, 몽골제국 이후 시기 몽골의 중요 구성원 중 하나였다. 위(衛)란 명나라 때(1368~1644년)에 국방을 위해 조직하여 전국 각지에 주둔시킨 군대 조직이었다. 명 초기에 명나라에 투항한 일부 몽골인들을 3개의 위로 편성하여 몽골로부터의 침략을 방어하도록 하였다. 이른바 우량하이 삼위는 타안위(朶顔衛)·복여위(福餘衛)·태녕위(大寧衛)로, 1389년 명 조정에서 이들 위를 설치하여 태녕도지휘사사(大寧都指揮使司)에 예속시켰다. 이후 영락(永樂) 연간(1403~1424년)에 노아간도사(奴兒干都司)로 소속을 바꾸었다.

우량하이 삼위는 처음에 오늘날의 중국 동북삼성 서부, 내몽골자치구 동남부에 해당되는 지역에 배치되었다. 지리적으로 이곳은 몽골과 명나라, 그리고 여진과 접하는 지역에 위치하였기 때문에 주변 세력들은 항상 삼위달자를 자기편으로 삼기 위하여 회유정책을 실시하였다.

삼위 중에서도 타안위가 가장 세력이 강하였는데, 타안위는 주로 몽골 우량하이 부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로 인하여 이들 삼위를 통칭해 우량하이 삼위라 불렀던 것으로 보인다.

내용 및 특징

우량하이 삼위는 동몽골·오이라트와 더불어 만리장성 북쪽에 위치하였다. 그중 동몽골이 중앙에 위치하였고, 서쪽 지역에 오이라트가, 동쪽 지역에 우량하이 삼위가 위치하였다. 이러한 지리적 위치로 인하여 동몽골과 오이라트, 우량하이 삼위는 오랫동안 긴밀한 관계를 이루어 왔다.

우량하이 삼위는 설치 이래 조공 관계 및 호시(互市)를 통하여 명나라와 비교적 안정적인 관계를 유지해 왔다. 그러나 동몽골의 세력이 강해지자 이들에게도 의지하여 명나라와 동몽골 사이에서 등거리외교를 행하였다. 이 때문에 여러 차례 명나라에게 공격당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정통 연간(1436~1449년)에 들어서는 북방 지역의 역학 관계가 일변하여 오이라트의 에센이 북방의 모든 세력을 복속시키고 강자로 군림하자 우량하이 삼위는 다시 명과 오이라트의 양대 세력 틈에 끼이게 되었다. 이에 우량하이는 명나라와 오이라트 사이에서 줄타기 외교를 펼쳤지만 실패하여 오히려 양 세력으로부터 공격을 당하는 곤경에 처하였다. 결국 우량하이는 여러 차례 자신들을 공격한 명나라에 원한을 품고 새롭게 강자로 떠오른 오이라트에 항복하였다. 또한 오이라트를 부추겨 명나라를 대거 침공하도록 하였다. 하지만 오이라트가 명나라를 대한 공격 이후로도 명나라와 오이라트 및 동몽골 사이에서 우량하이 삼위의 줄타기 외교는 줄곧 이어졌다.

1450년대 초에 오이라트의 에센이 위협을 가하자 우량하이 삼위는 이에 반기를 들고 오이라트의 내부 정황을 명나라에 알려 주었는가 하면, 에센이 죽고 동몽골 세력이 다시 부상하자 몽골의 볼라이([孛來], Bolai)와 결탁하여 명나라 변경을 침범하였다. 그러나 1478년(성화 14) 마시(馬市)가 재개되어 명과 다시 교통하게 되면서 상황은 역전되었고, 이후로는 몽골의 침략을 받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대체로 홍치(弘治)·정덕(正德) 연간에도 그대로 이어졌지만, 가정(嘉靖) 연간(1522~1566년)에 들어와서는 또다시 일전(一轉)하여 우량하이는 다시 명나라 변경을 침략하였을 뿐만 아니라 1550년에 몽골의 알탄([俺答], Altan) 칸이 북경 지역을 공격할 때 이를 적극적으로 도왔다. 대체로 우량하이 삼위는 명나라 초기부터 줄곧 명나라, 오이라트, 동몽골 등 강대 세력의 틈에 끼여 매우 어려움을 당하였다.

우량하이 삼위는 몽골 여러 부족 중 조선과 가장 가까웠던 관계로 『조선왕조실록』에서 여러 번 확인되는데 중국에 입구(入寇)한 자들은 모두가 해서(海西) 등지의 삼위달자 (三衛達子)요, 깊이 있는 달달(達達)이 아니었다는 기록이 있다(『세종실록』 31년 8월 18일).

조직 및 역할

타안위는 우량하이 삼위 중 가장 군사력이 강하였으며, 그 명칭은 원나라 때의 도욘 운두르 우량하이([朶因溫都兒兀良哈], Doyon ündür uriyangqai) 천호소(千戶所)에서 유래하였다. 타안위는 주로 몽골 우량하이 부족 사람으로 구성되었다. 1389년(홍무 22)에 설치되어 토르고차르([脫兒火察], Torquchar)를 지휘동지(指揮同知)로 삼았다. 이들은 초기에 도아하(洮兒河) 유역에서 유목하였지만 이후 남쪽으로 내려와 황하(潢河)를 넘어왔다. 희봉구(喜峰口)를 통하여 명나라에 조공하였고, 광녕(廣寧)에서 호시를 하였다.

복여위는 1389년(홍무 22)에 설치하여 해살남답해(海撒男答奚)를 지휘동지(指揮同知)로 삼았다. 이들은 초기에 오유이하(烏裕爾河) 유역에서 유목하였지만 이후 남쪽으로 내려와 지금의 요녕성(遼寧省) 신민(新民), 창무(彰武), 강평(康平) 일대로 이동하여 유목하였다. 희봉구(喜峰口)를 통하여 명나라에 조공하였고, 개평(開平)에서 호시하였다. 복여위는 주로 몽골 우지에드(Üjiyed) 부족 사람으로 구성되었다.

태녕위(泰寧衛)의 명칭은 원나라 때 태녕로(泰寧路)에서 유래하였다. 1389년(홍무 22)에 설치하여 원 요왕(遼王)아자시리([阿札失里], Ajasiri)를 지휘사(指揮使)로 삼았다. 이들은 초기에 지금의 길림성 도남시(洮南市) 일대에서 유목하였지만 이후 남쪽으로 내려와 요하(遼河) 유역으로 이주하였다. 희봉구를 통하여 명나라에 조공하였고, 광녕(廣寧)에서 호시하였다. 태녕위는 주로 몽골 옹니고드(Ongniγud) 부족 사람으로 구성되었다.

변천

16세기 중엽 몽골 대칸의 직속 만호(萬戶)인 차하르(Čaqar)를 위시한 좌익삼만호(左翼三萬戶)가 동진하면서 우량하이 삼위는 차하르 및 할하(Qalq-a), 그리고 호르친(Qorčin)부에 귀속되게 되었다. 그러면서 점점 그들에게 흡수되어 갔다. 예를 들어, 복여위의 우지에드 인들은 남쪽 할하의 다섯 오톡 중 하나가 되었는데 1610∼1620년대 여진 후금국에 복속되면서 더 이상 역사무대에 등장하지 않았다. 타안위의 우량하이 인들은 청 지배기 때에 내몽골 하라친(Qaračin) 및 투메드(Tümed) 부에 흡수되면서 더 이상 우량하이라는 명칭으로 불리지 않게 되었다. 태녕위 옹니고드 인들은 차하르에 귀속되었다가 1632년 후금에 투항하였다. 청나라 정부는 이들을 2개의 호쇼로 편성하여 내몽골 조 우다(Ju uda) 맹(盟)에 예속시켰다. 이는 바로 오늘날 내몽골자치구 옹니우드 기[翁牛特 旗]이다.

참고문헌

  • 동북아역사재단 편, 『명사 외국전 역주(明史 外國傳 譯註)』, 동북아역사재단, 2012.
  • Ван Мандуга, Монголын түүхийн толь, ӨМАХХ, 1999. (왕 만두가 주편, 『몽골사 사전』, 내몽골인민출판사, 1999.)
  • ШУА-ийн Түүхийн хүрээлэн, Монгол улсын түүх, Адмон, 2003. (몽골과학아카데미 역사연구소 편, 『몽골국 역사』, 애드몬,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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