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주목(吉州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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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함경도 길주 지방을 관할하던 관청이자 행정구역.

개설

길주목(吉州牧)은 1398년(태조 7) 설치되어 1895년(고종 32)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폐지되기까지 함경도 길주(吉州) 지방을 관할하던 주요 행정구역이었다. 15세기 말~16세기 초 일시적으로 현(縣)으로 강등되었을 때를 제외하고는 함경도의 유일한 목(牧)으로 존재하였다. 한편 군사적으로도 요충지로, 방어영(防禦營)이 설치된 독진(獨鎭)이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본래 고구려의 옛 땅으로,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 때에는 동경용원부(東京龍原府) 지역이었다. 발해가 거란에 멸망한 뒤 오랫동안 거란과 여진(女眞) 등 이민족의 지배 아래 있었다.

고려시대 1107년(고려 예종 2)에 윤관(尹瓘)과 오연총(吳延寵)을 보내어 군병 17만 명을 거느리고 여진을 쫓아내고, 지역을 경계를 구분해 정했다. 동쪽은 화관령(火串嶺)까지, 북쪽은 궁한령(弓漢嶺), 서쪽은 몽라골령(蒙羅骨嶺)까지 영토로 만들고, 궁한촌(弓漢村)에 670칸을 쌓고 길주라고 이름 지었다. 1108년(고려 예종 3)에 방어사(防禦使)을 두었고, 1111년(고려 예종 6)에 중성(中城)을 쌓았다가 바로 여진에게 돌려주었다. 뒤에 와서 원(元)나라에 편입되어 해양(海洋)이라고 이름 지었는데, 공민왕 때에 되찾았다. 1390년(고려 공양왕 2)에 길주등처관군민만호부(吉州等處管軍民萬戶府)를 설치하고, 영주(英州)·선화(宣化) 등의 진(鎭)을 모두 이 고을에 편입시켰다.

조선이 건국한 뒤 1398년(태조 7)에 동북면의 주(州), 군(郡), 현을 나누어 정할 때 길주목으로 고쳤다(『태조실록』 7년 2월 3일).

조직 및 역할

목사(牧使)는 무관 정3품으로 임기는 30개월이었다. 1605년(선조 38)에 방어영(防禦營)이 설치된 이후로는 방어사를 겸하였다. 『여지도서(輿地圖書)』에 따르면 목사에 직속된 이속(吏屬)으로 좌수(座首) 1명, 별감(別監) 3명, 군관(軍官) 11명, 영리(營吏) 2명, 계서(啓書) 2명, 호장(戶長) 1명, 아전(衙前) 71명, 지인(知印) 50명, 사령(使令) 28명, 군뢰(軍牢) 25명, 관노(官奴) 1,54명, 관비(官婢) 144명, 교노(校奴) 48명, 교비(校婢) 71명, 원노(院奴) 6명, 원비(院婢) 8명, 내노(內奴) 1,316명, 내비(內婢) 1,423명, 시노(寺奴) 945명, 시비(寺婢) 1,032명, 사노(私奴) 1,326명, 사비(私婢) 787명이 있었다.

『여지도서』에 따르면 길주의 관할 행정구역으로는 다이사(多二社), 다초사(多初社), 백삼사(白三社), 백이사(白二社), 백초사(白初社), 서이사(西二社), 서초사(西初社)의 7사(社)가 있었다.

변천

1467년(세조 13)에 길주 출신 이시애(李施愛)가 반란을 일으켰으므로 1469년(예종 1)에 목을 현으로 강등하고 이름을 길성(吉城)으로 바꾸었다(『예종실록』 1년 6월 29일). 또 고을의 북쪽인 영평(永平) 등의 지역을 분할하여 따로 명천현(明川縣)을 설치했다. 1512년(중종 7)에 다시 고을의 이름을 회복하고 목으로 승격시켜 목사와 판관(判官)을 두었으며, 명천현을 폐지하여 다시 길주에 편입시켰다(『중종실록』 7년 3월 15일). 1513년(중종 8)에 다시 명천현을 설치하고 판관을 폐지했다.

길주는 군사적으로도 요충지였는데, 다른 진영(鎭營)에 속하지 않은 독진(獨鎭)으로 오랫동안 방어영이 설치된 지역이었다. 1605년(선조 38)에 처음 방어사를 두어 목사를 겸임하게 했다. 이후 길주의 방어영은 시기에 따라 여러 차례 치폐와 이전을 반복하였다. 1609년(광해군 1)에 방어사를 폐지하고 목사만 두었다가, 다시 1614년(광해군 6)에 목사로 방어사를 겸임하게 했다. 1627년(인조 5)에 방어사를 폐지했다. 1701년(숙종 27)에 함경감사의 보고로 성진(城津)에 방어영을 다시 설치했다가, 1714년(숙종 40)에 감사의 보고로 길주로 옮겼다. 1746년(영조 22)에 심리사(審理使)의 보고로 도로 성진으로 옮겼다가, 1749년(영조 25)에 병조 판서김상로(金尙魯)를 따로 보내어 형편을 자세히 보아 살핀 뒤 길주에 도로 속하게 했다(『영조실록』 22년 8월 30일) (『영조실록』 25년 10월 18일). 이후에는 길주에 방어영이 계속 유지된 것으로 보인다. 1778년(정조 2)에 남병사(南兵使)를 지냈던 제주목사김영수(金永綏)의 건의에 따라 다시 길주의 방어영을 성진으로 옮기는 문제를 논의하였지만, 잦은 이동이 오히려 문제라는 중론에 따라 그대로 길주에 존치하기로 결정하였다(『정조실록』 2년 11월 27일). 이후 고종대까지도 길주의 방어영이 유지되었다.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으로 인하여 1895년 지방관제가 대구역주의인 8도제에서 소구역주의인 23부제로 바뀌었다. 따라서 길주목도 경성부(鏡城府) 소속의 길주군(吉州郡)으로 되었다(『고종실록』 32년 5월 26일). 1898년(고종 35)에 군의 서남쪽 설봉산 이남의 땅을 분리하여 성진군(城津郡)을 설치하였다가, 찬반 논란이 분분하여 1903년(고종 40)에 완전 분군이 되기까지 6년 동안 두 차례 통합과 분리를 반복하였다(『고종실록』 35년 7월 6일) (『고종실록』 38년 10월 20일) (『고종실록』 40년 8월 8일).

참고문헌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경국대전(經國大典)』
  • 『속대전(續大典)』
  • 『대전통편(大典通編)』
  • 『대전회통(大典會通)』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여지도서(輿地圖書)』
  • 손정목, 『한국지방제도·자치사연구(상)』, 일지사,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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