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인현(庇仁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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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서천군 비인면에 설치된 조선시대 지방 관청이자 행정구역 명칭.

개설

비인현(庇仁縣)은 조선시대 충청도 공주목에 속한 현이다. 통일신라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설치되었다. 15세기에 호수가 166호, 인구가 651명이었다. 군정은 시위군(侍衛軍) 4명, 수호군(守護軍) 28명, 선군(船軍) 57명이었다. 토지는 1,622결인데, 이 가운데 논이 1/3이 조금 넘었다. 1895년(고종 32)에 지방제도 개정으로 비인군으로 승격되었다. 1914년에 서천군 비인면이 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비인현은 삼국시대에는 백제의 비중현(比衆縣)이었다. 비물현(比勿縣)이라고도 불렸다. 당나라가 백제를 정복한 뒤에 빈문(賓汶)이라 고치고 웅주대독부(熊州都督府)의 속현으로 삼았다. 통일신라 757년에 비인현으로 고쳐 지금의 충청남도 서천군 지역인 서림군(西林郡)의 속현으로 삼았다. 고려시대에도 그대로 따랐다. 1018년(고려 현종 9)에 지금의 충청남도 부여군 지역인 가림현(嘉林縣)의 임내로 두었다가, 뒤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조선이 건국한 뒤에 1413년(태종 13)에 현감(縣監)으로 고쳤다.

조직 및 역할

수령이 단종대에 현감에서 현령으로 바뀌었다가 다시 현감이 되었다. 조선후기에는 문과, 음서, 무관 출신을 교대로 파견하는 지역이 되었다. 『여지도서(輿地圖書)』의 18세기 통계에 의하면 관아에 좌수 1명, 별감 2명, 군관 9명, 아전 20명, 통인 11명, 사령 6명, 관노 2명, 관비 3명이 속해 있었다. 관방시설로 도두음곶(都豆音串)이 현 서쪽 20리 지점에 있었다. 우도첨절제사(右道僉節制使)가 군사를 나누어서 이를 지켰다.

변천

조선후기에는 6개 면으로 구성되었다. 1759년(영조 35)의 기묘장적(己卯帳籍)에 의하면 편호는 3,238호, 남자 5,172명, 여자 5,436명이었다. 토지는 밭 672결 75부 1속, 논 706결 23부 1속이었다. 1895년에 지방제도 개정으로 비인군으로 승격되었다(『고종실록』 32년 5월 26일). 1914년 4월 1일에 행정구역 개편으로 서천군에 병합되어 충청남도 서천군 비인면이 되었다.

참고문헌

  • 『대동지지(大東地志)』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여지도서(輿地圖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