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련위(毛憐衛)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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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모련위 |
한글표제 | 모련위 |
한자표제 | 毛憐衛 |
관련어 | 몽골[蒙古], 여진(女眞), 위소(衛所) |
분야 | 정치/외교/외교사안 |
유형 | 집단·기구 |
지역 | 중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조선 |
집필자 | 이규철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모련위(毛憐衛)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태종실록』 8년 2월 27일 |
명(明)에서 두만강 유역의 토문(土門 혹은 豆門)과 아치랑이(阿赤郞耳) 등 지역의 여진 세력을 통치하기 위하여 설치하였던 위소(衛所) 중 하나.
개설
모련위의 정확한 위치는 현재의 자료만으로는 확인하기 어렵다. 다만 함경북도 경원(慶源)의 북쪽인 두만강(豆滿江)가의 두문(豆門)과 종성(鐘城) 북쪽인 벌시온(伐時溫) 일대가 모련위의 영역에 포함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두만강 북변 일대는 조선에서도 자신의 영향력 하에 있는 지역이라고 생각하였던 곳이다. 따라서 조선전기에는 해당 지역의 이해관계를 둘러싸고 조선과 명 양국 사이에 다양한 충돌 양상이 나타났다.
설립 경위 및 목적
명초 유기(劉基)의 건의를 통하여 시행되었던 위소(衛所)제도는 명 군사제도의 중심이었다. 특히 ‘위(衛)’와 ‘소(所)’는 명의 군사 편제상 가장 핵심적 단위로 자리 잡게 되었다. 위소는 명 전국의 군사 요충지에 설치되었다. 하지만 해당 지역의 상황에 따라서는 천호소(千戶所)가 설치되기도 하였다. 대부분의 지역에는 위가 설치되었다. 1393년까지 명에서는 전국적으로 329개의 위와 65개의 수어천호소(守禦千戶所)를 설치하였다. 명의 군사 체제에서 위소의 중요성은 보다 증가하게 되었다.
영락제는 본인이 즉위하였던 1403년부터 1409년까지 흑룡강(黑龍江)과 송화강(松花江) 일대를 중심으로 115개의 위소를 새로 설치하였다. 이후 1409년부터 1447년까지는 68개의 위가 추가로 설치되었다. 영락제의 재위 기간에만 168개의 위가 새롭게 설치되었다.
이 중 130개의 위가 영락제의 몽골 정벌이 시작되기 이전에 설치되었다. 이는 여진 위소의 설치 목적 중 중요한 한 가지가 바로 몽골 정벌을 대비해서 배후 세력을 확보하려는 의도와 연관되어 있었음을 시사한다. 결국 명에서 의욕적으로 위소를 설치하였던 것은 여진 세력은 물론 몽골 세력에 대한 방어와 관련된 군사적 목적이 중요하게 반영된 것이었다.
변천
조선에서 모련위에 대한 기록이 처음 나타나는 것은 『태종실록』이다. 당시 동북면찰리사(東北面察理使)김승주(金承霔)는 건주위지휘(建州衛指揮)어허출(於虛出)과 모련위지휘[毛憐衛指揮]보을호대(甫乙好大) 등이 진상한 물건 등에 대한 처리 방안을 조정에 문의하였다. 물건들은 모두 여진 추장들이 조선 왕이 아니라 동북면 찰리사에게 보낸 것이었기 때문이다. 태종은 동북면 찰리사가 보낸 물건들을 모아서 관리들에게 하사하였다(『태종실록』 8년 2월 27일). 이 기사에서 모련위에 대한 언급이 처음으로 나타났다.
명에서는 수많은 위소를 새로 설치하면서도 필요에 따라서는 폐지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모련위는 15세기 동안 계속 유지되었다. 모련위 지역은 조선의 외교정책에서 매우 중요한 곳이었기 때문에 조선의 15세기 기록에서는 상당히 자주 언급되었다.
조선과 명은 모두 압록강과 두만강 북변 일대의 여진 세력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하고자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아울러 해당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하여 다양한 정책들을 추진하였다. 양국의 이러한 인식은 여진 지역에 대한 이해관계를 둘러싸고 언제라도 대립할 수 있는 국제 관계를 조성하였다.
세조의 재위기에 이르러서 조선은 모련위 문제를 두고 보다 직접적으로 대립하게 되었다. 당시 조선은 모련위 지역에서 가장 유력한 추장이었던 낭발아한(浪孛兒罕) 등을 잡아다 처형하였다. 조선은 낭발아한이 통제를 거부한다는 명분 등으로 그를 처형하였다. 당시 그는 명의 고위관직을 받은 상황이었는데 조선은 낭발아한에 대한 처벌문제를 전혀 통보하지 않았다.
이후 명에서는 조선의 조치를 강하게 항의하는 사신을 파견하였다. 하지만 조선은 겉으로는 명에 순응하는 태도를 보였지만 바로 모련위 정벌을 단행하면서 해당 지역에 대한 깊은 외교적 관심을 드러냈다. 이러한 조선의 외교정책은 모련위 일대를 자신의 영역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명과의 대립 양상을 불러올 수밖에 없었다.
조선이 건국 직후부터 지속적으로 대외 정벌을 준비해 추진했던 근본적 원인에는 바로 여진 세력에 대한 지배권 문제가 결합되어 있었던 것이다. 또 두만강 일대의 지역은 태조이성계의 근거지로서 조선에서는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설사 명이라 하더라도 조선의 입장에서는 해당 지역에 대한 통제권을 쉽게 양보할 수 없었다.
참고문헌
- 『명사고(明史稿)』
- 『명사(明史)』
- 『명통감(明通鑑)』
- 『명성종실록(明成祖實錄)』
- 『명태조실록(明太祖實錄)』
- 남의현, 『명대 요동지배 정책 연구』, 강원대학교 출판부, 2008.
- 한성주, 『조선전기 수직여진인 연구』, 경인문화사, 2011.
- 河內良弘, 『明代女眞史の硏究』, 同朋舍出版, 1992.
- 김구진, 「초기 모련올량합 연구」, 『백산학보』 제17호, 백산학회, 1974.
- 박원호, 「철령위의 위치에 관한 재고」, 『동북아역사논총』 13, 동북아역사재단, 2006.
- 이규철, 「세조대 모련위 정벌의 의미와 대명인식」, 『한국사연구』 158, 한국사연구회,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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